영화 <파계>를 보고 제가 삶에서 원했던 것들에 대해

지난 주말에 곰TV 고전영화에서 오드리 헵번 주연의 <파계>를 봤어요. 

간단히 요약하면, 좋은 수녀가 되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가브리엘(오드리 헵번)이

결국 자신이 수녀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 걸 깨닫고 파계하는 내용이에요. (제목이 스포일러죠. ^^)


수녀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나오진 않지만 

오드리 헵번이 이삼십 대로 보일 때 시작해서 흰머리가 조금씩 보일 때 끝났으니 

적어도 10년 이상은 수녀로 보낸 것 같아요. 


그 오랜 시간 훌륭한 수녀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나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수녀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깨달음, 

자신이 수녀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저는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고요. 

(정체를 잘 모르겠으니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 = X' 라고 부르도록 하죠.) 

 

그런데 삶의 순간 순간 제가 직접적으로 원했던 것들은 X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정말로 원하는 건 X였는데 

X의 일부를 담고 있는 A를 원했다가 이게 아닌가벼 하고 돌아서서   

X의 다른 일부를 담고 있는 B를 원했다가 알고 보니 이것도 아닌가벼 하고 다른 길로 갔다가  

X의 또 다른 일부를 담고 있는 C를 원했다가 역시나 이것도 아니구먼 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제가 A, B, C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A, B, C를 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것... orz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것(X)의 정체를 희미하게 더듬어가고 있다는 것, 이 정도예요. 


돌아보면 A와 B와 C는 겉으로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들이었어요. 

A와 B의 경우 지금 제 경력에 거의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고요. 

C는 저에게 나름 성취감을 갖게 했고 지금 밥벌이에도 도움은 되지만 

C에 모든 것을 바쳐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혼자서 조용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D를 시도하고 있어요. ^^

(뭐, 이제 나이가 들어서 에너지도 부족하고 게을러서 시도가 되었다 안 되었다,  

내가 뭘 시도하고 있었지 까먹고 있다가, 뭐 그러고 있지만요.) 


이제는 D가 정말 제가 원하는 것일까, 저에게 적합한 것일까, 이런 질문은 저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저에게 삶은, 이런저런 뼈아픈 대가를 치르면서 저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거든요. 

제가 D에 적합한 사람이든 아니든, 저는 D를 통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더 알게 될 것이고, 

제가 원하는 X의 정체를 조금은 더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제까지 선택했던 A, B, C들이 지금 저에게 실제로 주는 건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라는 사람은 A, B, C를 거치지 않고는 X로 다가갈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돌아보니 A, B, C는 결국 X로 가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부터 한동안 D를 하다가 이것도 아닌가벼 하고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건 또 저라는 사람이 X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일 거라고 생각해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세상은 저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 같거든요. 

    • 삶은 그 자체로 삶이지 무언가를 이루거나 얻어내기 위한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내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들도 같은 일 10년 20년 하다보면 순전히 그만하고 싶어서 그만둔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다는 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어요.




      이러니 사람이 점점 쾌락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



    • 글 잘 읽었어요. 어쨌든 지금 이순간 나의 존재를 느끼고 있음에 감사를.
    •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글이었어요. 고마워요. 

    • 27hrs님과 터너님과 하미덴토님께 제 사랑을 담아~~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4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38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48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5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0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1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6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8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4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29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3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7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6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5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