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가 아님을 증명해봐(내가 사랑한 핀업걸)

1.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소설 속 화자는 다섯 살 남자아이.
낡은 스타킹을 잘라서 만든 가짜 뱀으로 밤에 숨어서 홀로 걸어오는 임신부를 놀라게 하는 장난을 치죠.
심심하면 달리는 자동차 뒤꽁무니에 매달리는 장난도 하죠.
밥을 먹으라는 누나에게 화냥년 계집이라고 욕도 하죠. 식탁에 억지로 끌고 가고 풍선 만드는 일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아기를 낳은 길고앙이 집을 지어주는 사람들을 놀라게하려고 벽돌을 떨어뜨리는 수준의 장난이죠.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한 임신한 여성의 태아는 떨어지지 않았고 자동차 사고도 나지 않았습니다.
다섯 살 주인공이 등장하는 동화인데 현실보다 잔혹한 사건 결과가 나오면 안 되잖아요.
유년 시기의 사악함과 잔인함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아동학대를 당하는 순진무구한 나의 제재는 그렇지 않다고 합창을 하니 저만 다른 소설을 읽었는 지 어리둥절했습니다.
일본만화 <짱구는 못말려>에서 느꼈던 어떤 불쾌감.
어리다는 이유는 절대적 면죄부가 되고 성인남성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선을 어린 짱구는 가볍게 넘어버리고 여성을 희롱하고 깔깔거리는 대리 성인 코미디물.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밝은 달이 비치는 밤이면
발가벗은 여자의 몸은 너무 황홀해.
가난뱅이 아버지가 싫다고 소리친 것이 미안하고 실직한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시작한 노래에 놀림당한다고 느낀 아버지는 주인공 따귀를 때리면서 폭행이 시작되죠.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더욱 고함을 지르며 주인공은 노래를 멈추지 않아요.
이런 서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관적인 전제가 필요하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 무궁한 다섯 살 남자아이가 부르는 누군가에게 배운 저질 가사.
그러나 이미 앞에서 누나를 상처입히고 싶을 때 상스러운 욕을 하죠.
이미 그런 욕설이 어떤 용도로 쓰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요.
그보다 강도가 더 낮은 저질 가사는 의미를 모른다니.
이 소설의 화자는 분명히 다섯살 화자라고 계속 독자를 세뇌하는데 사물을 인지하거나 직관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연령대는 아니군요.
주인공 다섯 살의 아이는 특별히 아주 똑똑하다고 양보하더라도.
자신을 폭행한 아버지를 주인공은 죽여버리겠다고 살의를 품죠.
빅 존스의 권총을 빌려 쏘아죽이는 죽음만이 죽음이 마음이 죽이고 사랑을 멈추는 것도 죽음이라고 철학적 고찰까지 나아가지만.
사실은 성인 남성이거나 더 자란 어린이가 다섯 살 어린 남자인 척 연기하는 것.
작가는 다섯 살의 기억만이 파편적으로 필요했던 것뿐이군요.
<어린 왕자>에는 나이가 등장하지 않아요.
심지어 비행기 조종사도 어린 왕자의 나이를 묻지 않죠.
그러나 독자는 그가 어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많은 독자가 울고 있어도 개인적으로 유년의 가장 잔인한 기품은 <어린 왕자>에서 느꼈죠.
유년기 자살과 죽음을 알게 했던 나의 동화 트라우마.
작가가 아프고 죽어가는 것 같이 보일 거라고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구에서 지능에 멍들진 않은 육체는 어디론지 갈 수 있다는 환상마저 박살내버림으로써 나의 유년도 같이 끝났죠.
국정교과서는 획일적이라서 다양한 시각이 묻힐 수 있다고 반대 여론이 높더군요.
오직 여가수 머릿속 모티브나 영감에는 죽으라고 획일적인 감상을 요구하는군요.
생각과 감상을 너무 한 반향으로 몰고 가는 독서는 상당히 위험하지요.
팔아야 할 앨범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치를 봐야 할 대중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론가가 아니라서 권위에 신경쓸 필요도 없고 자유롭네요.
2. 롤리타가 아님을 증명해봐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롤리타> 속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없다."라고 작가는 말했군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고전 <롤리타>는 롤리타 콤플렉스에 빠진 자를 희롱하는 소설이군요.
능력과 사회적 지위만 있으면 어린 여성은 쉽게 나에게로 온다는 신화를 처절하게 비웃는.
중년의 남성주인공은 어린 여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이토록 고단하고 피곤하고 어렵다니 실체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을 소유한 것이 아닌지 헷갈려합니다.
상대방의 무거운 사랑의 비장함에도 롤리타는 탈출할 계획도 세우고 그녀를 도운 젊은 남성을 사랑한다고 뒤에 답하지요.
그녀는 소유되지 않았고 점령당하지 않아도 그대로 실존하는군요.
왜 책의 제목이 험버트가 아니고 롤리타인지 선명해지네요.
고전을 넘어서 영화에서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미중년 Jeremy Irons가 연기해도 남성의 근원적인 아우라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토록 많이 한 여성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는 연기를 했건만.
논란이 되는 여가수가 롤리타 영화에서 소품이나 그 무엇을 차용했다면 이렇게 해석해도 될 것 같군요.
이봐요.
삼촌팬들.
제 앨범을 많이 사세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3. 문화대혁명 시대의 여론재판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대 대중은 여론재판을 즐기고 사회는 지식인의 재교육을 하기 위해서 광분했지요.
이제 <롤리타>는 전 세계에 출판되어도 한국만은 롤리타 콤플렉스를 일으킨다는 이유만으로 금서가 되어야 하는군요.
여가수 앨범을 보이콧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롤리타> 영화나 책을 금지하는 것이 더 올바른 순서같지만.
P.S 위의 사진은 <Pippi Longstocking>에 등장하는 색깔이 다른 짝짝이 스타킹을 가터벨트로 고정한 핀업걸 자세의 내가 사랑하는 주인공.
어른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소유자라서 어설프게 접근하다간 날려버리겠지요. 망사스타킹, 가터벨트 하나로 롤리타를 증명하라니 삐삐는 흥미가 없겠지만요.
사실 전 중학생 때 좀 늦게 읽은 편이라 그런지 아동학대로 애정결핍된 정서불안 제제에 납득 혹은 응원하며 봤었어요. 그리고 맞을 때마다 점점 미쳐가는 듯한 제제와 달리 폭력자들은 언제나 때린 후에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한 묘사가 섬뜩했구요. 개인적으로 아이유가 그걸보고 이중성이 섹시하다는 둥 했을 땐 경악스럽더군요. 단순히 짱구같은 선천적인 악동이 아니라 제제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니까요. 여튼 아무리 그래도 한 가수의 부적절한 해석을 두고 이런 식의 마녀사냥도 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아성애 논란은 그동안의 소비된 이미지에 엮여 물타기되는 식으로 보이고 설령 아이유가 소아성애에 대한 조금이라도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간 억지춘향마냥 본인에게 강요되었던 이미지의 자기연민의 미필적고의일 수도 있다고 봐요.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 가사가 밍기뉴의 시점으로 불린다해도 결국 제제는 아이유의 노골적인 페르소나 위치예요. 아이유편을 든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평소 아이유를 싫어했던 사람이라) 다시 한번 한국에서 여자 연예인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게 되는군요.
크레용신짱은 청년코믹지 만화 액션에서 어른용으로 연재를 시작했지만 단행본이 어린이들에게도 인기를 끌자 수위가 조금씩 낮아졌고 (일본 기준으로) 거의 전연령층이 볼 수 있게 변해갔어요. TV 애니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이 애들용이고요.
한때 일본 부모들이 크레용신짱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긴 했었지만 그 이유가 성적인 내용때문이 아니고 신짱이 너무 건방지고 말대꾸가 심해서 자녀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칠까봐 우려되서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