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강남에서 "강남 스타일"의 말춤을 형상화 한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고, 저는 의외로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웃기는 존재였는가를 기념하고 되새기는 것도 나름 교훈도 되고, 추억도 되는 법이지요. 다들 중딩 때 개폼잡고 찍은 사진 한 장쯤은 있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우고, 기념식도 유튜브로 생중계 해서 전세계의 무료한 인생들에게 소소한 웃음거리 안겨주는 것도 나름 OECD 가입국의 시민들로서 보람 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당 의원님들이 가슴에 꽃을 달고 길고 긴 축사 가운데 대통령 각하의 존함도 언급해 주고 하면 영광스럽겠네요. 아이 좋아~


강남 스타일 동상 하니, 어릴 때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던 "책 읽는 소녀" 상이 생각났습니다. 밤 12시가 되면 소녀가 눈을 번뜩이며 일어나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고, 그 책장이 다 넘어가면 학교가 무너진다고 소문이 흉흉했죠. 제가 다닌 학교의 소녀상은 하얗게 회칠이 되어 있었는데, 그 허연 소녀가 퍼렇게 눈을 번뜩이며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오금이 저릴 일이기는 합니다. 연방의 하얀사신!


자정이 되면 기동하는 자가 소녀만은 아니었습니다. 유관순 누나의 옷고름은 바람에 휘날리고, 이순신 장군의 눈에도 붉은 기운이 돈다지요. 소문 속 유관순 누나는 운동장으로 내려와 스무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녀는 그 늦은밤 왜 유산소 운동에 몰두했을까요? 열사이기에 앞서 몸매가 신경 쓰이는 십대 여고생이어서? 누나야 그렇다고 칩시다. 칼 차고 근엄한 장군도, 덩달아 이승복 어린이도 운동장을 돕니다. 중년의 해군 제독과, 십대 레지스탕스 소녀, 자기 주장 뚜렷했던 불우한 아동이 하루종일 곁눈질로 시계만 바라보다 일제히 파워워킹으로 하루종일 굳었던 근육을 푸는 모습이라니. 지금이야 안쓰럽기까지 한 그 풍경이 그 때는 그렇게 무서웠습니다. 다섯 살만 되도 인생을 안다고들 하지만, 사실 초등학생의 수준이라는 게 다 그 모양이죠.


공포는 아니어도 이래저래 학교에는 괴담이 많았어요. 우선 생각나는 게 수위 아저씨 이무기 격퇴설. 한 때 큰 연못이었던 학교 부지에는 승천을 기다리며 공을 쌓던 이무기가 살았습니다. 조금만 더 수련하면 득도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아뿔사! 초가지붕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는 민족중흥의 대역사로 그만 연못이 홀라당 새나라 어린이의 산실이 버린 거죠. 수련이 조금만 더 쌓이면 승천할 수 있었는데... 분하다... 터를 잃은 이무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며칠에 걸쳐 큰 비를 내려 하늘로 올라 갈 길을 마련하려 합니다. 이때 표표히 나타나 소풍 때만 되면 패악질 부리는 이무기를 격퇴한 이는 특공대도, 경찰도 아닌 수위 아저씨.


수위 아저씨, 칼도, 총도 아닌 삽 한자루를 들어 이무기를 때려 잡으셨다는데, 그런 거죠. 박봉에, 마땅히 이 땅의 자랑스러운 예비역 병장인 수위 아저씨. 배수관로 막히게 만든 게 너 이자식, 비암이냐? 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고문관 새퀴가?! 혈투 와중에 "타앗~" "뚜앗~" 하는 기합이 아닌, "옘병!!!!" 과 같은 사자후를 내뱉지 않았을까요? 수위 아저씨의 위엄은 그 뿐만이 아니어서, 제가 살던 동네의 아이들이 빨간 마스크의 공포로부터 안전한 등학교 길을 보장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수위 아저씨의 공로가 혁혁했습니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나 예뻐?" 라며 사상검증에 여념이 없던 빨간 마스크, 이무기도 퇴치했는데 그깟 마스크 쓴 여자가 대수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동상들이 아이들 모두 하교하고, 숙직 선생님 잠든 자정에야 일어나 유산소 운동에 몰두했던 이유가 다 있는 겁니다. 수위 아저씨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딜 감히. 비늘 달린 금수도 갔고, 마스크 쓴 동네 광년이도 100미터 5초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훅 갔습니다. 유산소 운동 매진하는 인물들이 누굽니까? 어떻게 될 지 알고도 거리에 나갔던 망국의 레지스탕스 소녀, 백성 버리고 도망친 국군통수권자에게 "살려는 드릴게" 편지를 받은 제독, 전방 경계가 뚫려 민가에 침입한 적군에게 살해당한 초딩. 나이와 성별에 상관 없이 인생의 쓴물만 잔뜩 먹다가 가신 고참들이자,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피아의 구분을 뒤집지 않으신 분들 아닙니까? 자정을 알리는 종이 뎅뎅뎅~ 치면 찌뿌드한 몸을 잔뜩 기지개 키며 일어나 오늘도 안전한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수고가 많으신 수위 아저씨와 눈인사나 하고 정답게 운동장을 도는 거죠. 건강박수 치면서.



    • 수위 아저씨는 다들 이렇게 무서운 존재들입니까?





      • 무서워서 이불 뒤집어 쓰고 플레이하던 <화이트 데이>네요. 


        8만 8천원 짜리 모바일 버전 한정판의 구성품 중에 머리귀신 우산이 있어서 살까 했는데... SKT가 아니라서 패스 ㅠ.ㅜ

    • B9UYZSkCMAA3znX.jpg




      이거보다는 유명해서 외국 사람들이 알아보려나요

      • 한국사람이지만 뭔지 모르겠어요. 뭐죠?
        • 패트레이버3 에 나오는 폐기물13호!!!
    • 뒤로걷기가 그리 좋다던데...
      • 뒤로 걸으면 무섭지 않아서 안 돼요. 가뜩이나 (⊙_⊙°))))) 걸을 텐데 뒤로 걸었다간 그대로 마이클 잭슨

    • 진지 댓글 달자면 저 학교 괴담 대부분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고 그 일본의 괴담들은 또 영국 등지에서 수입된 거라죠.
      • 흐흐 저도 김영하 씨 팟캐스트에서 듣고 처음 알음. 휴지에 그렇게 깊은 뜻이.. 친절하고 불쌍한 귀신인 줄만 알았는데..
    • 1.소년 탐정 김전일에서 학교 10대괴담 운운하면서 똑같은거 나오는거 보고 뭐야 우리학교에만 있던 괴담이랑 똑같네??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의 학교괴담이라는 조그만 책자를 보고 서야 (한국의 본격 민속학 서적이 아니었을련지) 우리학교에 있던 괴담과 다른학교에서 들었던 학교괴담의 총합이 책이 다들어있어서 놀랐고 그게 모두 일본꺼라는데도 두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수위 아저씨 이야기는 다른 사람한테 들었는데 수위 아저씨가 때려 잡아서 소풍을 못가게 됐다나 어쨌다나...

      • 시무룩한 이무기 어린이 설은 사람으로 변신한 이무기가 소풍을 따라 다녔고, 소퐁지에서 찍은 기념사진에 누구도 기억하지 못 하는 아이 하나가 찍혀 있더라, 그런데 비가 억수로 쏟어지던 날 자유수영하고 있던 이무기를 수위 아저씨가 때려 잡은 뒤부터,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 하는 아이는 사진에 등장하지 않았더라는 게 내용이죠(제가 아는 쪽으론)

    • 제가 들은 거로는 때려잡은게 아니고 그저 봤기 때문에 이무기가 용이 못되었다고 하더군요.

      • 승천 이무기 OTL 설은 폭포마다 전해지는 설인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에 용소에서 솟아올라 폭포를 타고 승천하려 하던 이무기가 비에 오도가도 못 하게 된 나무꾼에게 들켜서 OTL 하게 된다는 게 줄거리죠. 폭포타고 승천하려고 용트림 치다가 꼬랑지로 폭포절벽의 바위를 파바박 쳤는데, 그때 칼로 벤듯 자국이 생겼다는 부설도.

    • ㅋㅋㅋ

      유관순 괴담은 제 새대에도 있었는데 당시 국딩삼학년이었던 저는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위인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일축했죠. 겁 많고 미신도 잘 믿던 어린이였건만 아마 주입식 교육이 잘 돼 있었나봐요. 맹세코 저는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쓰레기 무단투기장 비슷한 곳이 있었는데 말이죠, 무려 그곳이 인민군이 육이오때 죽인 시체들이 개발과 함께 발견 된 곳이라는 소문이 돌았었죠. 봐 썩는 냄새도 나고 내장 같은 것도 보이잖아

      ... 이런 식이었는데 뼈도 아니고 내장이 그때까지 있을 리가요. 생선이었거나 아니면 어쩌면 유기된 시체쯤 됐을지도요.

      적어도 이 괴담은 저희 세대 정도까지만 유효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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