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데드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스포 有?)

0.

(초반부터 뻘소리가 나와서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클릭하신 것 맞아요. <데드풀>에 대한 감상입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말해봐야 안 믿거나 희한하게 쳐다볼 게 뻔해서 동네방네 소문은 못 내고 있지만, 며칠 전부터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최근들어 꽤 열심히 활동 중인 독서모임의 좋은 분들로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 약간의 호기심 정도는 가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는 그 모임에 계신 한 분정진정명 음원덕후님의 해석을 듣고 나서 흥미가 생겼거든요. 

클래식에 대해서는 커먼 센스의 하한선을 아슬아슬하게 저공비행하는 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라, 아직까지는 한 번 각 잡고 진지하게 몰입해서 감상하고 나면 다음으로 넘어가기 까지의 쿨타임이 좀 길어서 진도가 많이 나간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교향곡 1번의 3악장을 처음 들었을 때였어요. 도입부부터 뭔가, 음. 단조로 바뀌긴 했지만 굉장히 익숙한 멜로디가 들리는 게 아니겠어요?

심지어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 어쩔씨구 으흥흥 ding ding dong~' 하면서 가사까지 붙여서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였지요. 

기억을 되짚어 가다보니 유치원에서 돌림 노래 식으로 부르던 영어 동요의 멜로디라는 걸 떠올렸고, 유능한 프로구글러 님 덕에 말러가 그 동요의 선율을 자신의 첫 교향곡에 차용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어요.

아마 초연 당시에는 이것 때문에 욕을 바가지로 듣지 않았을까... 싶지만서도 어쨌거나 저는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하고, 또 굉장히 신선하다고 느꼈어요.




1.

어째서 서두에 근황 겸 말러 이야기를 굳이 길게 적어놓았냐면, 이것이 <데드풀>을 본 후의 감상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만화책까지 챙겨볼 정도로 장르 자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긴 하지만, 사실 자동차를 뒤집고 비행기를 떨어뜨리고 하는 화려한 볼거리를 걷어내고 나면 토대가 되는 서사 자체는 뭐 별 거 없다는 생각을 해요.

대부분의 히어로물은 '질식할 것만 같은 대의를 어깨에 짊어지고 희생제의에 가까운 시련을 통과하여 빌런을 때려잡는다'는 신화에 가까운 동일한 원형을 공유하면서, 그 안에 내재된 룰을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까요. 

단지 주인공이 방탕한 백만장자와 자경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거나, 바지 위에 빤스를 입는다거나, 외계인이거나, 신이거나, 혹은 방사능 뚜비이거나...하는 약간의 변주가 존재할 뿐이죠.

아, 물론 그게 나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요. :) 요는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적 레테르와 개별 작품 각각의 차별성은 모두 '캐릭터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 <아이언 맨>이 처음 영화화 되었을 때 엄청난 흥행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간지가 나니까! 겠지만서도,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쿨한 주인공이 개인의 욕망과 공공선 사이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는다...라는 것,

다시 말해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룰에서 '비교적' 벗어난 존재라는 것도 한 몫 했을거라고 생각해요.




2.

영화를 이미 보셨거나, 혹은 마블 유니버스의 세계관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데드풀>에서의 웨이드 윌슨이 어떤 캐릭터인지 잘 아실거라고 생각해요. 넵. 히어로의 거의 완벽한 안티테제에 가깝지요.

일단 약을 사발로 잡순 듯한 똘끼나 메타픽션적인 캐릭터성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제 1 행동원리가 공공선이 아닌, 철저히 개인의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요. 병신년 로맨틱 무비의 위엄

물론 상술한 바와 같이 <데드풀> 역시 어디까지나 히어로물이라는 레테르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4의 벽을 허물 수 있을 만큼 굉장히 자유롭게 느껴져요. 


이런 장르적 한계뿐만 아니라, <데드풀>은 워낙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고, 제작사가 제작사이니만큼(마블 스튜디오가 아닌 20세기 폭스죠.) 판권의 문제도 있고 해서 제작 과정에서 현실적인 제약 또한 은근히 많았지요.

웨이드 윌슨 -> 데드풀의 변이 과정의 서사에서 '데스'와의 접촉을 삭제하고, 총기가 잔뜩 든 헬로키티 가방을 택시에 놓고 내리는 걸로 퉁치고... 파괴된 헬리캐리어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무슨 쌍팔년도 전대물처럼 채석장 삘나게 데포르메 해버리질 않나... 우야든둥 그래서 세계관의 확장, 편입 등 속편을 암시하는 장치 없이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나쁘게 말하면 단촐한 결과물이 나왔는데, 저는 오히려 이 점이 더 좋았어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따지거나 주의를 분산시킬 필요 없이, 캐릭터 자체에 오롯이 몰입해서 리미노이드 상태에 돌입했을 때의 텐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개봉한 히어로물 중 어뮤즈먼트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영화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p.s. 제 주위의 감상평은 호불호가 좀 극명하게 나뉘는 편인데, 문제는 역시 개그 코드를 수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 같아요.

대체적으로 재미없게 봤다는 지인들은 <빅뱅 이론>이나 스탠드업 코미디같은 것도 별로 안 좋아하더군요.


    • 저예산이라구 해서 찾아봤어요.




      설국열차가 39,200,000달러


      아이언맨 3가 200,000,000달러


      데드풀이 58,000,000달러

      • 히어로물이라면 기본이 1억달러는 넘기는 줄 알았는데 이정도면 저예산이쥬.... 

        • 그쵸.


          근데 킥애스는 두 편 찍는데 52,000,000 달러. 1편 30,000,000달러, 2편 22,000,000달러.

          • 표현을 빼먹어서 오해하신 모양이네요. 죄송죄송;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혹은 'DC 확장 유니버스', 혹은 '엑스맨 실사영화 시리즈'에 편입된 작품들 중 저예산이라는 뜻이에요.


            말씀하신 킥애스는 마블 코믹스 원작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해당 사항이 없죠.

          • 그리고 말씀하신 <킥애스>도 <데드풀>과 비슷한 스탠스를 가지고 있긴 한데 무엇보다 킥애스 캐릭터 자체가 별로 매력이 없어서 힛걸에 묻힌 감이 있기도 하고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 히어로보다는 능력자배틀에 가까운 덧 같기도 합니다.

      • 같이 나오는 <엑스맨> 시리즈만 봐도 신화적 원형을 제거해놓으면 전형적인 능력자 배틀물에 가깝긴 하죠 ^^; 



    • 말이 너무 많아서 프란시스처럼 입을 꼬매버리고 싶은 충동이 잠깐 났네요

      아니 입이 막혔는데도 말은 잘하는군요
    • 이상하게 자꾸 <피구의 제왕>이 떠올라서 더 웃겼습니다. 킥애스와 비교되는 모양인데 제 눈에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구요. 각본이 누군가 했더니 좀비랜드 쓴 사람들이더군요. 그 영화도 예상치를 살짝 넘기는 재미가 있었죠. 근데 그 발렌타인 광고는 한국에서 어째 좀 잘못 먹힌듯. 보고 나오는데 어떤 커플이 불평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히어로물 데드풀과 로맨스물 데드풀을 별개로 알고있었던 거 같았어요ㅎㅎ.

    • 히야 . . 글 잘쓰신다~

      넘나 잼난 것!
      • 엌; 과찬이십니다 ^ ^;

        • 과찬 아니구요. 진짜 성격 좋으신 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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