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오퓔스 감독의 아름답고 쓸쓸한 사랑영화들
어제 저녁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니 뭔가 비극적인 사랑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예전에 찜해 놓고 못 찾은 막스 오퓔스 Max Ophüls 감독의 영화 몇 편을 열심히 찾아서 봤어요.
로라 몽떼(Lola Montes, 1955), 윤무(La Ronde, 1950), 쾌락(Le Plaisir, 1952)를 보고 싶었는데
앞의 두 영화를 찾았죠. 사실 저는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그렇게 재밌게 보진 않았는데
마담 드(Madame de..., 1953)를 보면서 처음으로 막스 오퓔스 감독에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실 조금 전까지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도 이 감독의 영환 줄 알았네요.
과거에 흘러간 사랑을 회상하며 얘기를 진행하는 방식이나 영화 전체에 흐르는 쓸쓸한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해요.
차이점이라면 막스 오퓔스의 영화에서는 감독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관객이 마치 서커스의 구경꾼처럼
주인공의 사랑 얘기를 지켜보게 만들고, 그런 거리감이 사랑에 빠졌다가 떠나가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을
묘하게 더 우스꽝스럽고 쓸쓸하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점이죠.
[로라 몽떼]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한 여자의 일생을 서커스의 왁자지껄한 쇼처럼 보여줘요.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에 관객들은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비난과 조롱을 퍼붓기도 하고... 그렇게 영화는
누군가의 위태로운 사랑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은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저 지나가는 추문일 뿐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윤무]에서는 배경이 서커스에서 회전목마로 바뀌고, 주인공도 한 사람으로 고정되지 않아요.
A가 B와 사랑을 나누고, B가 C와 사랑을 나누고, C가 D와 사랑을 나누고, D가 A와 사랑을 나누는
그런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죠. 인물들이 느끼는 게 사랑인지 욕망인지도 모호하고, 마치 끊임없이
회전목마를 바꿔 타고 흘러가지만 그 자리를 돌고 도는 것처럼 사랑 얘기를 보여주고 있어요.
뭔가 상당히 낭만적이고 에로틱한 사랑의 장면들인데 보여주는 사람도, 보고있는 사람도 이미 알고 있죠.
그 순간들은 잠깐 꾸었던 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을 다시 맛보기 위해 끊임없이 맴돈다는 것을.
제가 봤던 아름다운 영화들은 언제나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웃긴 것 같아요.
아름다운 코미디 영화는 어딘지 조금 슬프고, 아름다운 비극 영화는 어딘지 조금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었어요.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요.
막스 오퓔스 감독의 무모한 순간(The Reckless Moment, 1949), 만인의 여인(Everybody's Woman, 1934)
There's No Tomorrow(1939)도 보고 싶어서 찾고 있어요. '무모한 순간'과 '내일은 없다'는 제목부터 제 취향이군요. ^^
때마침 이런 시를 발견했어요. 멋진 시라 옮겨 봅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41933.html )
소네트 73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
댓글 달리기 힘든 글일 것 같다는 느낌이 삐리리 와서 자급자족 댓글 하나 달아봅니다. ^^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찾아보고 있어요.
소네트 138
내 사랑이 참사랑을 맹세하면
거짓말을 알면서도 믿나니,
세상의 거짓에 익숙하지 않은
풋내기 청년으로 생각하길 바라기 때문.
내 나이 한창때를 지난 줄은 그녀도 알건만,
나를 젊게 보도록 헛되이 바라면서,
바보처럼 그녀의 허황한 말을 믿네.
양쪽 다 뻔한 진실을 감추고 있네.
정절하지 않다고 왜 그녀는 고백하지 않는지?
늙었다고 나는 왜 말하지 않는가?
아, 사랑의 습관은 짐짓 믿는 체하는 것이며
사랑의 연륜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그녀와 눕고 그녀는 나와 누워
결점투성인 채 거짓말에 우리는 만족하느니.
저도 시로 댓글 하나 달게요. 막스 오퓔스 감독의 미국 시절에 [포획(Caught, 1949)]과 [무모한 순간(The Reckless Moment, 1949)]을 통해 함께 작업한 배우 제임스 메이슨이 유려한 트래킹/달리/크레인 쇼트를 사랑하는 오퓔스를 보고 지어 바친 시입니다.
트랙이 필요치 않은 쇼트는
늙고 가련한 막스에게는 고통이나니,
달리에서 그를 떼어놓으면,
깊고 깊은 우울에 휩싸이는구나.
한 번은, 그의 크레인 앗아갔더니,
영영 미소를 잃은 줄 알았지.
A shot that does not call for tracks
Is agony for poor old Max,
Who, separated from his dolly,
Is wrapped in deepest melancholy.
Once, when they took away his crane,
I thought he'd never smile again.
막스 오퓔스 감독이 그렇게 트래킹/달리/크레인 쇼트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요. ^^
어쩐지 어제 영화 볼 때 인물을 가운데 놓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면이 좀 보이긴 했어요.
앞으로 이 감독의 영화를 볼 때는 어떻게 찍은 건지 유심히 봐야겠어요.
(그런데 영어 자막이면 읽느라 바빠서 뭐 화면은 보는 둥 마는 둥 ㅠㅠ)
제임스 메이슨은 Odd Man Out에서 너무 비극적으로 멋지게 나와서 기억에 남는데
이런 시까지 짓다니 멋지네요. ^^ 얼마 전에 [분홍신]을 보고 배우 안톤 월브룩이 좋아졌는데
[윤무]와 [로라 몽떼]에도 나와서 반가웠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에 어울리는
뭔가 비극적인 분위기의 배우 같아요. ^^
저도 막스 오퓔스 감독 영화는 <마담 드...> 밖에 보지 못했는데 아벨 강스와 더불어 기회가 된다면 쭉 연달아 보고싶은 감독이에요.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수업시간에 클립으로 한 장면만 봤는데도 너무 끌리더라구요. 특별전 같은 걸 해주었으면...!
막스 오퓔스 감독의 영화들이 유튜브에 있긴 한데 자막이 없어서 불어 영화는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ㅠㅠ
영어로 된 [무모한 순간]과 https://youtu.be/r0a4MhuTBUw?list=PL8C4069CC6F4D3744
[포획] https://youtu.be/7BAVR8rdL4E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https://youtu.be/S0R2STZUUNQ 아쉬운 대로 열심히 들어볼 수 있고요.
아벨 강스 감독은 누군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있어요. 어쩐지 이 분 영화는 더 찾기 힘들 것 같네요. ^^
막스 오퓔스 영화는 큰 화면으로 극장에서 보았으면 좋겠는데 기회가 별로 없네요. 집에 쾌락/마담 드/미지의 여인 DVD가 있긴 한데, 쾌락에서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여인의 시점 샷이나 마담 드의 무도회 장면을 크~게 보고 싶어요. 롤라 몽떼의 컬러 스펙터클을 시네마테크에서 본 이후로 더더욱 아쉽네요.
어제 막스 오퓔스 감독 영화들을 보면서 [무도회의 수첩]을 소개해 주신 ally 님 생각이 났어요. ^^
그런데 역시 이 감독의 영화들도 이미 보셨군요. [로라 몽떼]인지 [롤라 몽테스]인지 번역 제목이
오락가락이지만 이 영화는 이상하게 시작부터 가슴이 아프더군요. 뭔가 감독의 마지막 작품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무]가 더 정교하게 잘 만든 영화인 것 같긴 하지만...
그런데 막스 오퓔스 감독처럼 사랑 영화 만드는 데 인생을 통째로 바친 감독은 처음 보네요. ^^
필모그래피에 온통 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 영화들뿐이에요.
지난 주말에 루치노 비스콘티의 [센소]와 윌리엄 와일러의 [제저벨]을 봤는데 둘 다 사랑에 몸을 던지는
여인들의 이야기라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가 어제 막스 오퓔스 감독의 영화까지 보는 바람에 지금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심취해 있어요. ^^ 그런 영화로 이자벨 위페르가 나온 [마담 보바리, 1991]도 생각나고
얼마 전에 본 [분홍신]도 생각나네요. (역시 give and take로는 아름다울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들고 ^^)
영화 [쾌락]을 찾아서 봤는데 이건 한글자막에 화질도 아주 좋아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 초반에 어찌나 카메라가 에로틱하게 움직이는지 ^^ 사람이 나올 때는 마치 그 몸을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것 같고 건물이 나올 때는 그 벽을 스르륵 훑으며 지나가는 느낌이라 완전 신기했어요.
어떤 대상을 거리를 두고 말없이 따라다니는 느낌이라 묘한 긴장감을 주기도 하고요.
[윤무]나 [로라 몽떼]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쾌락]에서는 유난히 카메라 움직임이 제 눈을 사로잡더군요.
저는 [쾌락]의 첫 번째 얘기가 제일 마음에 들고 세 번째가 다음이고, 사실 중심인 두 번째 얘기는 그냥 그래서
영화 선호도는 로라 몽떼, 마담 드, 윤무가 순위를 정하기 힘들게 다 좋고 쾌락은 그 다음이에요. ^^
제가 옛날에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를 봤을 때는 아마 자막도 없이 영어로 듣느라
중간 중간 졸면서 본 게 틀림없어요.
오늘 갑자기 생각나서 이 영화를 영어자막 있는 영상으로 봤는데 제 기억에 없는 장면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튀어나오네요. 예전에 그렇게 재미있게 보지 않았다는 말 완전 취소예요.
<마담 드...>보다는 조금 덜 가슴 아프지만 참 아름다운 영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