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영화들
최근에 막스 오퓔스 감독의 프랑스 영화들을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시적인 영화들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poetic으로 검색을 하다보니 Poetic Realism으로 분류되는 영화들이 있더군요.
criterion.com에서는 아예 그런 영화들을 한묶음으로 모아놨어요. https://www.criterion.com/explore/15-poetic-realism
저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에 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데 poetic realism에 4편이나 선정되어 있으니 갑자기 궁금해져서
[게임의 규칙], [위대한 환상], [인간 야수] 세 편을 연달아 봤어요.
가장 먼저 보기 시작했던 [게임의 규칙]은 보는 내내 이상하게 힘들어서 영화의 중반을 넘을 때까지 이걸 계속 볼까 말까
서너 번은 망설였죠. 사실 중반 이후에도 별로 재미가 없었지만 일단 끝까지 보고 나서 imdb에서 평점을 형편없이 주고
듀게에 이 영화 재미없다는 글을 격렬하게 써주리라 다짐하면서 봤어요. ^^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참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드는 바람에 멍~ 하더군요. 지루했던 장면들이 정교하게 짜맞춰지는 느낌이랄까...
(보는 내내 힘들게 한 게 미워서 imdb에서 10점 만점에 7점 줬다가 한 시간 뒤에 8점으로 올려줬어요. ^^)
이런 영화에는 '고전'이라는 딱지가 좀 필요한 것 같아요. 저같이 참을성 없는 사람을 끝까지 보게 하려면.
[게임의 규칙]을 다 보고 나니 갑자기 인내심이 강해졌는지 감독에 대한 믿음이 생겼는지 [위대한 환상]과 [인간 야수]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봤어요. [위대한 환상]에는 탈옥이 나오고 [인간 야수]에는 살인이 나와서 둘 다 어느 정도 긴장감과 재미도 있었고요.
그런데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들은 보고 나면 잘 만든 것 같긴 한데 그렇게 제 마음을 파고드는 영화는 없네요.
'인간 야수'는 제목은 완전 제 취향인데 기대한 만큼 그렇게 강렬한 영화는 아니었어요. 좀 비극적인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이상한 거부감으로 몇 년 동안 묵혀뒀던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를 세 편이나 보고 나니 갑자기 속이 개운해지면서
프랑스 영화 다 나와보라 그래, 뭐 이런 전투적인 자세가 되더라고요. ^^
poetic realism에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영화도 세 편이나 있어서 [새벽]과 [안개 낀 부두]를 차례로 봤어요.
영화 시작부터 살인이 나오고 주인공이 뭔가 불가피한 운명에 빠져드는 듯한 비극적인 느낌이 드는 [새벽]을 좀 더 재미있게 봤지만
[안개 낀 부두]도 묘하게 비현실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로 사로잡는 게 있어서 끝까지 보게 되더군요.
(근데 두 영화 모두 poetic한 것 같긴 한데 별로 realistic한 느낌은 아니었어요.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가 좀 더 사실적인 듯)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망향(Pepe le Moko)도 찾아봤는데 비평가 평점이 엄청 좋아서 기대했지만 뭐 그렇게 대단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어요.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어둡고 우울한 느낌의 두 영화보다는 좀 더 밝은 분위기인데 주인공에게 탈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
그런데 poetic realism 영화는 그냥 배우 장 가뱅의 영화더군요. [위대한 환상], [인간 야수], [새벽], [안개 낀 부두], [망향]을 이어서
보고 있는데 이 배우가 계속 주인공으로 나오는 거예요. 193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는 남자 배우가 이 사람밖에 없었나 싶을 정도로.
멋있긴 한데 너무 자주 보니... ^^ 오늘 마지막으로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을 보며 poetic realism을 마무리할까 하는데
다행히 이 영화에는 장 가뱅이 안 나오네요. (아저씨, 미안 ^^)
어쨌든 poetic realism에 속하는 영화들을 많이 봤는데도 poetic에 대한 제 욕구는 아주 만족스럽게 충족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주제별로 모아놓은 영화들을 찾아보는 건 꽤 재밌는 일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Criterion에서는 이런 여러 주제들로 영화를 모아놨는데 => https://www.criterion.com/explore/themes
저는 앞으로 요런 주제들의 영화를 찾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멜로드라마: https://www.criterion.com/explore/154-melodrama
광적인 사랑: https://www.criterion.com/explore/133-amour-fou
눈물나게 하는 영화: https://www.criterion.com/explore/160-tearjerkers
성장영화: https://www.criterion.com/explore/106-growing-pains
이 글 역시 댓글 달리기 몹시 힘든 글인 것 같아 새로 찾은 정보 하나 덧붙여 봅니다. ^^
Criterion에 유명인들이 뽑은 Top10 영화를 모아놓은 게 있네요. => https://www.criterion.com/explore/top10
웨스 앤더슨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115-wes-anderson-s-top-10
봉준호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212-bong-joon-ho-s-top-10
기예모 델토로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125-guillermo-del-toro-s-top-10
(델토로 감독은 동순위 영화들이 많아서 거의 top 20로군요.)
제인 캠피온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28-jane-campion-s-top-10
자비에 돌란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102-xavier-dolan-s-top-10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42-richard-linklater-s-top-10
니콜라스 뢰그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51-nicolas-roeg-s-top-10
폴 슈레이더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55-paul-schrader-s-top-10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탑 텐: https://www.criterion.com/explore/214-martin-scorsese-s-to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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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시적인 걸 기대하고 제 글을 읽으셨다가 그렇지 않아 실망하신 분들을 위해 시 한 편 ^^
무지개나라의 물방울
정현종
물방울들은 마침내
비껴오는 햇빛에 취해
공중에서 가장 좋은 색채를
빛나게 입고 있는가.
낮은 데로 떨어질 운명을 잊어버리기를
마치 우리가 마침내
가장 낮은 어둔 땅으로
떨어질 일을 잊어버리며 있듯이
자기의 색채에 취해 물방울들은
연애와 무모에 취해
알코올에, 피의 속도에
어리석음과 시간에 취해 물방울들은
떠 있는 것인가.
악마의 정열 또는
천사의 정열 사이의
걸려 있는 다채로운 물방울들은.
저는 이제까지 프랑스 영화를 별로 안 봐서 앞으로 볼 수 있는 영화가 무궁무진해요. ^O^
자크 베케르 감독의 영화 중 [Casque d'or, 황금투구, 1952]가 '광적인 사랑' 주제에 묶여 있군요.
이걸 제일 먼저 보고 그 다음엔 [Le Trou, 구멍, 1960] 이건 탈옥에 관한 영화라 재밌을 것 같네요.
둘 다 재밌으면 [현금에 손대지 마라, 1954]를 그 다음에 봐야겠어요. ^^
막스 오퓔스의 멋진 영화들이 50년대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져서 그런지 50년대 영화들에 기대가 커요.
여러군데 클릭해봤는데 당연히 못본 영화가 태반이네요 아쉬운 영화게시판 회원.
안 본 영화가 많으면 앞으로 볼 영화가 많이 남아 있으니 좋은 거 아닌가요?? ^^
(앞으로 평균수명 90세라는데 긴긴 세월 동안 영화나 보죠. ^^)
저는 관심 있는 주제로 묶여 있는 영화 목록들, 좋아하는 감독들의 탑 텐 영화 목록들을 보니
보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기는데 가끔영화 님도 가끔 같이 보고 좋았던 영화 알려 주세요. ^^
새영화를 보겠나 지금까지 봤던 영화들을 보겠나 하나만 선택하라면
저는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새 영화를 선택할 것 같아요.
만약 지금까지 만들어진 (안 본) 영화와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영화를 선택할 것 같지만요. ^^
좀 전에 찾았는데 정성일 아카이브라는 사이트가 있네요. http://seojae.com/critic/
지금 베케르의 <구멍>을 보고 있는데 이 영화는 시작부터 재밌네요. 좀 전에 <황금 투구>를 다 봤는데
후반부는 괜찮았지만 르누아르, 카르네, 뒤비비에, 베케르의 사랑 영화들은 어쩐지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는
느낌이 별로 안 들어서 제 마음을 사로잡질 못해요. ^^ 장 그레미용 감독의 영화는 찾기가 참 힘드네요.
oldies 님이 추천하시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열심히 찾아봤는데 영 못찾겠어요.
<인간의 욕망>은 제목부터 완전 제 취향 ^^ 이 영화는 바로 찾았어요. <학이 난다>도 찾았고요.
(<학이 난다>를 찾다가 러시아 영화 잔뜩 찾았네요. ^^)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도 찾았고요.
전에 추천해 주신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와 <서부의 사나이>는 다 재밌게 봤는데 라라미가 좀더
재밌었어요. 사실 <격노>를 제일 보고 싶었는데 이 두 개를 먼저 찾아서 뒤로 밀리는 바람에 (한번 밀리면
언제 볼지 기약이 없지만 ^^) 그래도 안소니 만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많이 찾아놨어요.
언제나 좋은 영화 많이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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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 다 봤는데 설득력 있게 멋지게 각색했네요. 시작 부분에서는 장르 영화 같은 느낌이 강해서
<인간 야수>의 가라앉은 비극적인 느낌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인간 야수>보다
등장인물 각각의 욕망이 훨씬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흥미로웠어요. 바꾼 제목이 아주 적절하네요.
그래도 초반의 기차 장면은 <인간 야수>가 더 멋져요. ^^ 프랑스 영화들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뚜렷하지
않은 건지, 감정 표현이 생생하지 않은 건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참 멋있는데 어쩐지 등장인물들에
감정이입하기가 힘들어요. ^^
저는 사실 poetic에 realism이 붙은 것부터 알쏭달쏭했어요. ^^ 시적이라는 게 서사적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의미라면 사실적일 수가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서사적인 스토리 중심이 아니라 서정적인 감정 표현이 중심이라는 의미라면
사실적이 될 수도 있나 싶기도 한데... 에잉 모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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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을 응축해서 보여주는 듯한 영화를 보며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때면
시적인 것이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리얼리즘인지는... ( '')??
그렇죠? 사실 아이러니컬한데, 어감상 대강 이미지는 그려지잖아요. 저도 그걸로 유추되는 영화는 있는데, 참 애매모호한 장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그런데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자주 올려주세요 히히.
신나게 놀다가 연휴가 끝나니 슬퍼서 시 한 편 ㅠㅠ
외출
정현종
한기가 물에 스며
얼고 있는 물의 마음
하염없는 정감으로 별빛만
있고 바람만 있는 여기
모래의 마음으로
지금은 바깥을 걷고 있네
골수에 빠져 있는 우수며
지껄이며 오는 욕망 또는
머리에 가득 찬 의식의 불
사이서 믿을 수도 없이
장난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걷고 있네 봄밤의 길을
공기는 낮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고요와 고요의 다리가 되어
가등(街燈)의 공기는 가등 곁에서
나무의 공기는 나무 곁에서
제 것인 색채와
제 것인 가락으로 흐르고 있지만
여기 우리는 나와 있네
고향에서 멀리
바람도 나와 있고 불빛도
평화가 없는 데를 그리움도 나와 있네
Hong Nhung - Nothing in This World
사물의 꿈 1
- 나무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