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맨부커 인터내셔날 상 수상

좋아하는 작가가 상을 타게 되어 너무 기뻐 올립니다.

여기 영국 현지 시각으로 5월 16일 오후 10시 5분인데요.

오늘 저녁 발표했어요.

15분 전 BBC 뉴스입니다.

 

http://www.bbc.co.uk/news/entertainment-arts-36303604

 

축하드려요!

 

++++

아니, 그렇다면 - 시상식장에 계셨다면, 한강 님이 30분 거리에 계셨다는 이야기인데, 흑, 사인 받으러 갈 걸 그랬나봅니다.

하지만, 저는 알라딘 작가 이벤트 때 당첨되어 <소년이 온다> 친필서명본이 있지요. 홀쭉 날씬한 필체.

 

+한국에서도 기사가 올라가기 시작하네요.

아, 상 탈 줄 알고 - 수상을 기원하며-  책 미리 사 둔 건 안 비밀...

표지에 <Shortlisted>라고 박혀 있는데, 이제 수상작이 되었어요.

 

+++

사실, 채식주의자는 출간되었을 때 읽고 그 강렬함 때문에 다시 읽지는 못하는 책 중 하나지만,

번역본으로 읽으면 어떨까 싶어서 사 두었는데, 바쁜 시간이 지나면 용기 내어서 읽어 보려고 합니다.

 

 

++그냥 가기 뻘쭘해서, 제가 좋아하는 <희랍어 시간>의 한 장면 옮기고 갑니다.

작가님이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 때,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장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말한 그 대목입니다.

 

 

..................

소스라치며 그는 눈을 뜬다. 일어나 앉는다. 자신이 깨어난 것이 현관 밖의 인기척 때문이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닫는다.

 

잠기지 않은 현관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쪽이 약간 밝아진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 어두워진다. 누군가가 신을 벗는 기척이 들린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지만 아까보다는 창이 밝아져, 사람의 어두운 윤곽을 짐작으로 더듬을 수 있다. 검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는 두 눈을 치뜬다. 붕대를 감지 안은 왼손으로 세차게 마른세수를 한다. 가까워진 머리카락에서 번져오는 선명한 비누 냄새를 맡는다. 갑자기 추워진 듯 그의 몸이 떨린다. 검은 형체에서 흰 것이 뻗어나온다. 그의 왼손을 잡아 펼친다. 다른 흰 것이 천천히 뻗어나와 그의 손바닥에 쓴다.

 

안경점이

문을 열

시간이에요.

 

촉감을 따라 그는 문장을 읽는다.

 

혹시

처방전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비가 와서,

내가

혼자

다녀오는 게

좋겠어요.

 

그는 더 기다린다. 더 많은 말을 기다린다. 그녀의 얼굴에서, 몸에서 배어나오는 차가운 습기를 느낀다.

 

처방전이

어디 있어요?

 

왼손을 그녀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빼내며 그는 몸을 일으킨다. 책상으로 다가가려는 것이었는데, 문득, 그럴 수밖에 없는 듯, 어둑한 공기 속에 떠오른 그녀의 희끗한 얼굴을 향해 다가선다. 견딜 수 없이 떨리는 왼팔을 들어, 처음으로 그녀의 어깨를 안는다.

투명한 테이프로 입이 틀어막힌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이 굳어 있는 것을 그는 모른다. 간밤에 이 방에서도,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녀가 잠들지 못한 것을 모른다. 뜨거운 물과 아이의 거품비누로 오랫동안 샤워를 한 뒤, 식탁 앞에 앉아 희랍어 공책을 펼친 것을 모른다. 얼음 아래 수십 갈래 길을 더듬듯 죽은 희랍어 문자들을 적고, 견딜 수 없이 생생한 모국어 문장들을 끈질기게 이어 적은 것을 모른다.

 

어둠을 향해 두 눈을 뜬 채 그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다. 틀려서는 안 되는 무게를 재는 것 같다고 느낀다. 틀려버리고 말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고 느낀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어디 있었는지 그는 모른다. 색색의 우산들로 붐비는 방학식 날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버즈 라이트이어가 그려진 우산을, 그 아래 보이는 아이의 반바지를, 무릎에 박힌 팥알만한 갈색 점을 알아본 것을 모른다. 오늘 왜 왔어. 내일이 만나는 날이잖아. 겁내는 듯 작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본 것을 모른다. 그 얼굴에 흘러내린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준 것을 모른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준비한 말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열었던 것을 모른다. 멀리 안 가도 돼. 아무 데도 안 가고 엄마랑 있어도 돼. 같이 도망가도 돼.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어, 라고 말하기 위해.

 

그녀의 셔츠가 비와 땀에 젖어 있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허공에 둔 채, 그는 그녀의 등을 끌어안은 왼팔에 조금 더 힘을 준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세게 문을 닫으며 복도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침묵하는 그녀의 우산에 빗줄기들이 소리치며 떨어졌던 것을 그는 모른다. 운동화 속의 맨발들이 흠뻑 젖었던 것을 모른다. 갑자기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길에서 헤어지면 기분이 더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녀가 안으려고, 팔을 붙들려고, 손을 잡으려고 하자 물고기처럼 재빨리 빠져나간,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운 살갗을 모른다. 빗물이 고여 생긴 검은 웅덩이들을, 그 위로 날카로운 대침처럼 꽂히던 빗발을 모른다.

 

닫힌 창틀 사이로 빗소리가 파고든다. 거리의 모든 도로를, 건물들을, 움푹 파이게 하고 금가게 하려는 듯 세찬 소리다. 누군가 신발을 끌며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다시 어디선가 문이 거칠게 닫힌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이에서 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 것이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한강, <희랍어 시간>, 180-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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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식쟁이라 소설은(도) 잘 모르는데 좋네요.이런 계기인게 좀 머쓱하지만 읽어봐야겠어요.
    • 이런 기회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좋은 기회인 듯 싶어요.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했더니 예약이 꽉 차있더라고요. 진작 읽어볼 것을 그랬네요.

    • 저걸 어찌 번역했을까

    • 너무 기쁘네요. 꿀꿀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던 차에 기운나는 뉴스입니다!!

    • 영어본으로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지에도 좋은 리뷰가 올라 왔다던데...

    • 아 전에 얼핏 소식을 듣긴 했는데 후보 선정이었고 이번에 수상이 확정된 거였군요. 좋은 작가의 좋은 소식을 들으니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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