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 감상 (스포 넘칩니다 & 장문 주의)

원작도 읽었고 시나리오도 보고 나서 영화를 접한 터라 선입견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태였음을 감안해주시길 바립니다. 치밀한 심리묘사와 전지하고 거대한 여성의 서사가 매력인 원작과는 달리 영화 <아가씨>는 코미디적인 요소가 더해진 좀 더 명쾌하고 가벼운 이야기더군요.


시나리오에서 약 20% 정도는 삭제된 듯 한데 삭제 부분이 대부분 1부의 숙희(의 히데코에 대한) 감정 쇼트여서 시나리오에 비해 뼈대는 온전하지만 정서가 다소 도려져 나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숙희의 감정이 더 잘 쌓여가고 보여 져야 2부에서의 히데코의 감정 또한 드라마틱하게 보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요. 물론 지금 러닝타임도 145분으로 일반적인 상업영화 기준으로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배급을 고려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독판 얘기가 벌써 나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부자들>의 사례도 있으니 전략적으로 지금처럼 2시간 남짓한 버전의 영화를 개봉하고 3시간 넘는 감독판을 추후에 개봉해서 또 보러 오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감독판이 아마 정서적으로는 훨씬 매끄러울 거라 예상됩니다.

 

김민희 김태리의 캐스팅, 그리고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더라고요. 다른 캐스팅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요. 1부 시나리오에서 감정쇼트가 상당부분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숙희와 히데코의 마음을 관객들이 충분히 읽고 따라가게 되는 건 배우들의 힘이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정우의 경우에는 좀 아쉬움이 남아요. 개인적으로 하정우의 수많은 작품들 중 <멋진 하루>, <비스티 보이즈>, <추격자>, <범죄와의 전쟁>이 최고작이라 생각하는데 전자의 경우 마초적인 ‘찌질함’이 극대화된 영화들이고 후자의 경우 수컷의 ‘마초성’이 부각된 영화들이죠. 그게 하정우라는 배우가 가진 원초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숙희, 히데코와 대비되는 마초성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백작 캐릭터가 영화 전체를 장악해서는 안 되고, 찌질함이라는 수식어는 백작 캐릭터에 잘 붙는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하정우에게 딱 맞는 옷은 아니라는 느낌이 커요. 마초성이 조금 덜하고 약간 교활한 느낌이 있는 배우가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있을까요?) 이 영화의 코미디의 8할은 하정우가 해주고 있고 그게 하정우라는 배우 본연의 캐릭터에서 나오는 느낌인데 (과장된 남성성의 과시와 완벽한 척 하지만 어설픈 수작 등) 그게 감독이 원한 거라면... 저랑 캐릭터의 해석 자체가 다른 것일 수도 있고요.    

 

주인공들의 일본어는 조진웅이 제일 낫고 하정우가 가장 형편없더라고요. 띄어읽기와 さ/ざ 등 탁음을 구별해서 발음하는 것이 안되니 일본어 대사를 알아듣기가 어려웠어요. (저는 일본어를 합니다.) 조진웅은 영화 <명량>에서도 일본어 발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류승룡이 워낙 처참해서 더 대조가 되었었죠) 이 영화에서도 꽤 자연스럽게 일본어 억양을 넣어서 연기하더군요.

 

시나리오 상에서는 백작의 엔딩 장면에서 백작이 진심으로 히데코에게 연심을 품었던 것처럼 환상 시퀀스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 손을 꼭 잡는 과거의 순간을 백작이 회상하는 장면으로 바뀌어 있더라고요. 시나리오 읽으면서 숙희와 히데코가 중심이 되어야 할 엔딩에서 사기꾼이자 ‘남성’인 백작의 순정(?)을 보여줘서 어쩌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매우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캐롤>이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 비해 레즈비언 섹스씬이 대상화되어 있다는 얘기가 종종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런 인상을 받게 되기는 합니다. 특히 마지막 선실 내에서의 섹스씬의 경우가 그렇죠. 침대 놔두고 (시나리오 상에서는 침대에서 하는 걸로 되어 있어요) 불안하게 의자에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서 섹스를 한다는 건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나요? 그 장면의 미쟝센이 미술, 조명적으로 거의 웨스 앤더슨 급 대칭을 이루는 걸 보니 감독이 변태라서 이 씬을 이렇게 가져갔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면령 설정도 저는 좀 보여주기식이라고 생각했어요. 낭독회에서의 레퍼토리 중 레즈비언 섹스씬에서 나온 아이템이긴 한데 그게 히데코한테 그만큼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싶어서요.  


<스토커>를 보고 영화 장면 장면의 아름다움에 매혹이 되었던 터라 처음 이 영화의 캐스팅을 듣고 또 시대적 배경을 알게 되고서 영화의 미쟝센에 대해 엄청나게 기대를 했는데 영화를 막상 보니 너무너무 아름답다는 말까지는 안 나오더라고요. 여배우들의 얼굴도 몸짓도 아름답고 칼 같이 조경한 정원도 아름다웠지만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조명 그러니까 빛과 그림자에서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의상이나 미술에 충분히 공을 들였지만 <스토커>나 <박쥐> 등과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뉴트럴하게 찍었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히데코의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이 저택 자체가 책이 빛에 바래지 않게 날씨가 늘상 우중충한 곳에 있다는 설정이고 히데코가 사실상 갇혀 사는 공간이니까요. 그만큼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빛을 맞으며 둘이 들판을 달리는 장면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죠. 그래도 저는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습니다. 제 기준 한국 최고 미모 여배우인 김민희를 데리고 극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길 바랬거든요.

 

이건 잡설입니다만, 보영당도 경성에 있는 설정일테고 총독부에서 전기를 끌어온다고 했으니 저택도 경성 근교 어딘가 일텐데 (그런데 바다가 있죠!) 멀리멀리 일본에 있는 정신병원에 보영당 식구들이 짠 나타나는 것과 나중에 고베에서 붙잡힌 백작이 끌려가는 과정 등이 점프해서 그려져서 좀 신기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영화에서 구구절절하게 이동경로를 보여줄 수야 없겠지만요.  

 

결론적으로 영화 자체에는 아쉬움이 남지만 한국영화의 소재의 다양화, 표현의 경계 확장, 나름 최선을 다해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동주>의 사례도 그렇고 한국영화계에서 과감한 시도는 나이 많은 베테랑 감독들에게만 허락된다는 현실은 다소 씁쓸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하정우보다 마초성은 덜하고 더 교활한 이미지의 주연급 배우라면...이정재? ㅎ

      • 앗 박해일음 어떤가요?
        • 박해일이 연기하면 왠지 삼촌을 능가하는 진성 변태처럼 보였을 것 같기도 하고요ㅎㅎ 농담입니다. 워낙 좋은 배우이니 잘 했을 것 같아요.
      • 이정재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김민희와의 관계 때문에 출연 안 했을 것 같아요ㅋㅋ
    • > 면령 설정도 저는 좀 보여주기식이라고 생각했어요. 낭독회에서의 레퍼토리 중 레즈비언 섹스씬에서 나온 아이템이긴 한데 그게 히데코한테 그만큼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싶어서요.  


      이미 낭독회 때부터 그 장면에서 아가씨는 숙희를 상상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보면, 납득이 갈 만도 하더군요 (100% 수긍은 아닙니다 ㅎ;;)



      • 네 낭독회에서 다른 책들 읽을 때와는 다르게 보여지죠. 근데 저 같은 경우엔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에 와닿지는 않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히데코가 낭독회에서 얻은 트라우마가 어마어마할텐데 그걸 이렇게 스무스하게 소화해냈다는 게 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 조진웅이 부산 출신이라는 점이 일본어 대사에 영향 미치지 않았을까도 싶어요. 부산 사투리의 성조(?)가 일본어와 많이 유사하더라구요. 서울 사람이 일본어를 읽으면 서울말처럼 들릴 때도 많은데 부산 사람이 일본어를 읽으면 그럴 듯하게 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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