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개인적인 소감 정리 (스포일러 많음)
어제 '비밀은 없다'를 두번째로 보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 의문점들을 메모해봅니다.
스포일러가 너무 많아서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건가 잘 모르겠네요.
안보신 분들은 스크롤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 '연홍'의 행동들에는 모성에 대한 엄청나게 리얼한 묘사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종되던 날 우산도 안가져갔다고 김밥 몇개 먹은 게 전부라고 걱정하는 모습.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없는 단서를 찾아 딸의 행적을 스토킹하는 모습 등.
넷상에서 본 관객들의 반응 중에 손예진의 하는 행동이 비정상적인 것 같다는 말에 저는 전혀 공감을 못했어요.
영화를 같이 본 저희 엄마는 민진이와 미옥이의 아지트를 부수는 장면 등 일부 행동은 너무 과한 것 같다고 하던데,
저는 엄마가 왜 그 감정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생각했죠. 전 그 장면에서의 감정이 소름돋게 리얼하게 느껴졌었어요.
* 미옥이가 사물함 앞에서 민진이에게 말을 걸 때 민진이의 귀에서 이어폰 한쪽을 빼서 자기 귀에 꽂습니다.
연홍은 민진이가 듣던 음악을 같은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민진이의 행적을 추리하려고 합니다.
* 연홍이 딸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 딸의 정신세계, 고통, 깊은 애정, 범죄에 가까운 일탈, 연민을 가진 마음씨.
* '지니와 오기' 뮤직비디오 등 십대 아이들의 정신세계 묘사에 감독의 애정이 많이 담긴 것 같았습니다.
그 정신세계가 미친 것 같아서 보기 괴로웠다는 넷상의 반응도 재밌더군요.
* 결말을 알고 두번째로 봤을 땐 연홍과 종찬의 대사들이 중의적으로 들리는 게 재밌었습니다.
ex) "당신이 사람 시켜서 죽였는지도 모르지(연홍)" "우리 딸이 나 때문에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종찬)"
* 선거 전 날 연홍은 상다리가 부러지는 만찬을 종찬에게 차려주며
딸의 죽음과 부인이 당한 테러가 모두 상대 후보의 짓이라고 끝까지 우겨서 선거에서 이기라고 말합니다.
아마 연홍에게 테러를 한 사람도 종찬이 시킨 것이라는 힌트가 그 대사에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 종찬은 시종일관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는 사람 같습니다.
연홍에게 한 테러는 딸의 실종과 죽음의 진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연홍을 좌절시키면서
선거에서 동정표도 확보하려는 전략 같습니다.
* 카메라 앞에서 통곡하는 종찬과, 죽은 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도착한 이벤트 차 앞에서 통곡하는 종찬.
어느 쪽의 눈물에 진심이 얼마나 담겨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정치인으로서, 종찬은 현재 속해있는 '한국당'을 최대한 뽑아먹고 당선 후 신당 창당을 계획 중입니다.
딸이 죽은 날엔 늦은 밤 '세종당'의 의원과 만나서 은근히 신당의 대표직을 미끼로 던지는 것 같구요.
일일교사 장면의 대사를 보면 아나운서 출신인 것 같고 딸의 담임과 바람을 피울 만큼 대담합니다.
특정한 누군가를 저격했다는 느낌은 안들었지만 최근의 뉴스들을 연상시키는 익숙한 그림들이라 생각했습니다.
* 딸의 장례식날, 무덤 앞에서 연홍이 "옘병"을 되뇌이는 모습에서도 개인적으론 시의성을 느꼈습니다.
첫 관람 때, 절대악이 존재하지 않았던 <미쓰 홍당무>와 비슷한 구도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딸의 죽음과 함께 깨진 후,
한참 낯선 곳으로 끌고 다니다가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결말을 보고 저도 좀 당황했었죠. 좀 인위적이지 않나 하는 의심과 함께.
영화를 보고 며칠 후에 서서히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민진이와 미옥이의 감정들이 마음 아프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두번째 관람에서는 악으로 묘사된 대상에 대한 진정성 있는 혐오도 느껴지더군요.
"어휴 똥냄새 창문 좀 열게요" 같은 대사에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두번째 관람 후, 이 영화에 대한 '삐그덕거린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무당인 고향 친구의 대사 속에 연홍의 학생 때 장래희망이 영부인이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연홍도 종찬의 부인이 될만큼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던 캐릭터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미옥이와의 대화에서 연홍은, 민진이의 성적이 갑자기 오른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할만큼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대사를 통해서 자신이 스스로를 속인 적이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 "널 죽이면 내가 지는 것이니 어디 한번 끝까지 살아보라"는 연홍의 대사에 종찬은 미소를 띠며
"나 오늘 노재순 이겼다"라고 응수하는데, 이 대사엔 "너도 같은 과잖아"라는 도발이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대사를 듣고 고통스러워하는 연홍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손예진씨 사랑합니다.
* 사실 미쓰 홍당무스럽게(?) 유머러스하게 표현된 초반 장면들 중에도 복선이 많이 깔려있었습니다.
미옥의 성적표와 그에 대한 담임의 설명을 듣고 "그거 거짓말이잖아요"라고 속으로 독백하는 장면과,
민진의 예전 담임의 탁상달력에 공교롭게도 딸이 실종된 날이 표시되어 있는 걸 보고 연홍이 묻자
담임이 "그날은 곗날"이라고 대답하는 장면 등. 그 외에도 한 두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이 안나네요.
* <미쓰 홍당무>의 코멘터리에서 등장인물이 도구가 되는 것이 싫어서 단역들에게도 캐릭터를 부여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인상깊게 들었었는데, 이번 영화는 연홍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인지 다른 캐릭터들이 상대적으로
흐릿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첫관람 직후 했었죠. 두번째로 보니 그건 저의 오해고 처음에 못보고 넘긴 디테일들이 많았더군요.
* 특히 민진이의 전 담임 선생님 묘사가 압권이었습니다. 탁상달력에 표시된 날이 "곗날"이라는 대답을 시작으로
연홍의 추궁에 시종일관 의뭉스러운 둘러대기로 일관하는 캐릭터는 또 다른 차원의 코미디었던 것 같습니다.
* 성인을 뛰어넘는 포쓰를 보여주는 사춘기 소녀 미옥이 대통령에게 남긴 유서에서 보여지는 의외의 어린아이 같음도 재밌었죠.
* 종이 울린다 땡때댕땡. 치마를 살랑살랑. 미친년 꽃다발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이경미 작사가님 팬입니다.
관객에는 친절하지 않은 영화라고 관객과 평론가들의 영화평이 극과극이군요.
관객의 입장에서 꼭 보고 싶네요.
지금 막 보고 왔어요. 구구절절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