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과거)


 1.오늘...이 아니라 어제군요. 어떤 모임에서 만나게 된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게 됐어요. 이상하게도 그것은 빛바랜 사진처럼, 꺼내서 입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무채색의 기억 같은 거였어요. 남에게 일어난 일처럼요.



 2.08년 1월 어느날이었어요. 훈련소라는 곳에 있었는데 훈련같은 건 없었고 쓸데없는 갈굼, 쓸데없는 욕설, 무의미한 일과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나날이었죠. 저는 이 한달만 버티면 앞으로 인생에 하기싫은 일 따위 평생 안해도 될 거라는 말도 안되는 착각을 하며 버티고 있었고요. 뭐 당시엔 그런 착각을 할 만하긴 했지만요.


 문제는, 훈련소는 정보가 차단되는 곳이예요. 미들즈브로에 간 이동국이 삽질을 하고 있는지 아닌건지 알 수 없었고 카메라를 잃어버린 한 남자(진관희)가 일으킨 나비효과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고 뭐 그랬어요. 도통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거예요.


 

 3.훈련소에는 좀 이상한 녀석이 있었는데 나보다는 아니었지만 제법 똑똑한 편이었어요. 과학고 조기졸업-카이스트 수학과 테크를 탄 녀석이었는데 이 녀석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매일 머리속에 든 시를 하나씩 종이에 필사했어요. 그런데 그 시 하나하나가 '세상에 이렇게 긴 시가 있었나?'라고 외치게 만들만큼 긴 시였어요. 


 셋 중 하나였죠. 정말 이걸 외워서 쓰고 있는거거나 아니면 아무 글자나 끄적거려 놓고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시라고 우기는 중이거나 아니면 그 시를 즉석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거나요. 시를 들여다보니 완성도가 높아서 두번째 경우는 아닌 거 같고...세번째 경우라면 이 녀석이 언어의 천재라는 거니까 그냥 이 녀석이 머리속에 시 폴더를 가지고 있다는 걸 믿기로 했어요.   



 4.휴.



 5.어느날 이녀석에게 편지가 왔어요. 녀석의 누나가 보낸 거였는데 종이에 엄청난 밀도의 빼곡한 글씨로 훈련소에서 놓쳤던 정보들이 주욱 써있었어요. 심지어는 날씨 정보 같은 것까지 써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보며 이 녀석이 이 녀석의 가족 중에서 가장 괴짜는 아니었나보구나라고 주억거렸어요.


 문득 궁금해져서 '혹시 코스피지수도 적혀있냐?'라고 물어봤어요. 별 기대는 안하고요. 그런데 그가 대답했어요.


 '1600이라는데요?'


 그 말을 듣는순간 토센카나메의 청충종식 염마귀뚜라미에 얻어맞은 켄파치의 기분을 알 수 있었어요. 사회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대응했겠지만 손도 못써보고 흘러내리고 있을 내 주식에 대해 상상해 보니 돌아버릴 거 같았어요. 



 6.지금 생각해보면 이 거대한 사이클 안에서...2006~7년 사이에 주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개인투자자는 롤러코스터의 제일 극적인 구간을 맛본 사람들일거예요. 롤러코스터가 정점을 향해 달릴 때는 대학교 졸업반이었는데 교수의 연줄로 LG전자에 가려고 애쓰는 동기들을 보며 의아해했을 정도니까요. 그들을 보며 '왜 저들은 노동따위를 하려는걸까?'라고 진지하게 마음속으로 궁금해하곤 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도 취업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나를 보며 궁금해했겠죠.



 7.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리만브라더스가 망하며 나쁜 일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정말 쓸 돈이 없어보니 한달에 한번 확실한 유동성이 지급되는 곳에 소속된다는 게 얼마나 간절한 건지도 이해하게 됐어요. 


 이건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쓰지도 않은 돈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있는데 '도둑이야!'라고 외칠 수도 없는 거예요. 왜냐면 합법적으로 사라지는거니까요. 합법적으로 눈앞에서 누군가의 연봉일 수도 있는 돈이 일 단위로 깎여나가고 있는 걸 보고있자니 뭔가 나자신이 토막나는 기분이었어요.


 

 8.그리고 이게 내가 처음으로 겪는 '진짜로 나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우리 인간들을 가축화시키는 이 문명 세상엔 유사품들 뿐이잖아요. 유사 분노, 유사 슬픔, 유사 기쁨, 유사 불안, 유사 위험같은 것들요.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은 그냥 대충 기쁜 척하거나 화난 척하거나 슬퍼하는 척하는 연기를 해내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솔직이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일은 결과가 뭐든 상관없는 거예요. 동전의 앞뒷면일 뿐인 일이지만 거기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이죠. 영화를 대충 보고 아무렇게나 별점을 내리는 막장 평론가들처럼요.



 9.어쨌든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 일들을 겪고 나니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일은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어요. 사실 일상생활의 99%는 찌질하고 우스운 일일 뿐이라고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어요.


 '여은성님에게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 의문이 풀렸네요.'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 또한 내가 내게 느끼고 있던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어요. 그 기억은 늘 있었지만 그 기억을 입 밖에 내어 말하니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기분이 되살아났거든요. 색이 빠진 사진에 컬러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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