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연대기

추석에 부모님과 전화로 인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영화 '밀정'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평소에 그런 말씀 잘안하시던 아버님께서 꼭 보라는 당부까지 하시는걸로 봐선 제법 재미있게 보신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얘기로 대화가 자연스럽게 넘어갔습니다.

어렸을때 아버지는 가끔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셨지만 대부분 위인전에 나오는 영웅들 무용담같은 허황된 얘기라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일화라든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기위해 다리에 매달려 버텼다던 이야기라든지 하던 그런 얘기들이요.
철들고 나서 처음 들어보는 할아버지 이야기는 좀더 정제된 톤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도 조부께 직접 들은것보다는 사료를 찾아서 본 내용에 가까운것이었으니까요.

1919년에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때 고향인 해주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것이 시작이었던것 같습니다. 풀려난뒤 바로 만주로 가서 군사학교를 이수하고 바로 독립운동단체에 투신하셨다는군요. 다시 국내로 잠입해서 고향에서 지부를 조직하고 친일파 처단,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체포되어 7년형을 받으셨다고 기록이 나옵니다. 길어보이지만 23~26세 사이 겨우 4년간의 일이었습니다. 나름 풍족한 지주 계급인 집안이 장손덕분에 풍비박산이 난게 안봐도 눈에 선합니다. 출소후에도 줄곧 도망자 생활을 하셨던것 같습니다. 그와중에 할머니를 만나고 일본에서 아버지도 태어나고 바쁘게 사셨던거 같기도 합니다.

해방후 고향에 돌아오셔서는 조부의 인생중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보내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병약하셨던 할머니를 매일 생선을 드시게 하려고 따로 어부를 고용하셨다는 얘기로 봐서는 나름 풍족했던것 같구요. 물론 그 행복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할아버지에게 협조를 요구하면서 끝이 났지만요.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요청에 확답을 하지않자 바로 미행이 붙고 위협을 느낀 조부는 바로 아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겁니다. 밤새 조부는 아들을 안고 산을 탔고 추격자들과 총격전을 벌였다는군요. 아버지께선 탄환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아지랑이가 기억에서 잊혀지지가 않고 그날이 모친과의 마지막일줄은 예상치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쯤에서 끝났고 그후의 이야기는 당신께는 힘든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아버지가 20세되는 해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으니까요. 너무 일찍 돌아가신탓에 아버지도 조부에 대해 모르는게 많았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계속되는 법이고 조부께서 입원한 그 병동에 외할아버지가 계셨고 거기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처음 만나셨다는군요:)

+ 외할아버지는 조부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오신 분이셨습니다. 평생을 직업없는 한량으로 사셨고 언젠가 봤던 옛날 사진첩의 당신께선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모던보이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예전 문학책에 있었던 커피를 끓이며 겨울엔 스키타러 가야겠다는 글을 본인이 쓰셨대도 믿길 정도입니다.

결론은 저는 두분중 외할아버지의 삶이 부럽고 기질적으로도 더 가깝다는 슬픈 고백이었습니다.
    • 국가유공자 유가족이시군요! 7년형 받으실 정도면 단순 가담을 넘어서 활동이 꽤 대단하셨다는 건데. 혹시 단체 이름을 아시는지요? 제 짧은 지식으로는 대한독립단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그 당시 꽤 이름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사실 대부분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경우가 많았지요. 집안 재산 가져다 활동 자금으로 쓰고 그랬으니까요. 운동 하다가 이래저래 가산 탕진하는 경우도 흔하고요. 


      여하간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 중에 해방 후, 혹은 말년에 잘 되는 경우 없다고들 하는 말이 이런 경우에는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래도 조부님 같은 분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독립 국가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 대한독립단 맞아요. 독립운동이 아니라도 당시 혼란한 시대 흐름속에서 개인의 행복을 온전히 추구한다는게 어려웠을거 같아요. 독립운동을 안했다면 당시엔 편했겠지만 해방후 북쪽에서 예수쟁이 부르주아는 척살대상 1순위였을테니까요.

    •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시라니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아직 밀정을 못 봤는데 나중에라도 꼭 챙겨보고 싶어요. 무한도전 안창호선생님 에피소드 보면서도 굉장히 감동했었습니다.


      아이에게도 두고 두고 독립운동가분들 이야기를 해주려고 합니다. 밀정은 아직 같이 보기엔 어렵겠지만요.
      • 자랑스러운 부분도 있고 한편으론 사진 한장 못남긴 조부보다는 당시에 이미 카메라를 소유하신 외조부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밀정의 실제인물인 황옥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 글쓴 분에 비하면 부끄러운 집안 자손이네요 조부모님이 실향민이셔서 더 그랬겠지만 일제시대가 요즘 말로 두 분 리즈 시절이셨죠 젊은 때이기도 했고요

      그때가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하셨죠 이웃에 살던 일본인하고 지내던 이야기도 하시고요 말년에 할아버지는 아버지 시켜서 교보에서 문예춘추를 사오게 하셨죠 덕분에 이케다 리요코의 에카테리나를 연재로 보는 호사도 누렸지만요..
    • 할아버님 같은 분들이야말로 존경 받고 대우 받아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세상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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