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틱틱)


 1.휴...날이 밝아오네요. 강북에 있다가 들어오게 되면 대체로 동작대교를 거쳐야 해요. 동작대교를 지나갈 때는 반드시 차창 문을 열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껴보는데 최근엔 날씨가 확실히 추워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도 택시가 동작대교를 지나가는 몇초간 창문을 열고 그 바람을 쐬는 게 기분이 나아지는 몇 안되는 일이예요. 



 2.그저께인가는 어떤 일을 겪었어요. 그 일을 겪고 보니 언젠가 한 감나무 얘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오늘 돌아오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감이 손에 들어오게 되어도 그게 딱히 인생을 바꿔줄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야 업그레이드는 가능하겠죠. 하지만 지금의 생활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과 지금의 생활이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 업그레이드만 되는 건 완전 달라요. 영화로 치면 다른 영화를 보게 되는 게 아니라 늘 보던 영화를 리마스터링된 버전으로 보게 되는 것 뿐이죠. 음식으로 치면 매일 짜장면만 먹고 살던 사람이 다른 음식을 먹게 되는 게 아니라 다른 가게의 짜장면을 먹게 되는 것 뿐이고요.


 업그레이드된 생활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생활과 어차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거기서도 인간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예요. 물론 더 친절한 버전의 사람들을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주위에 친절한 사람들만이 남게 되면 그건 정말로 고립되는 느낌일 것 같아요.


 그래서 친절함을 원하다가도 친절함에 둘러싸이면 갑갑한 기분이 들곤 해요. 어떤 사람에 대해 써봐요. 이 사람은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으니 닉네임은 안 정하는 걸로 하죠.



 3.나는 당당히 행동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당당함이라는 것은 아마도 여유나 자신감에서 흘러나오는 거라고 여겨요. 


 나는 애초에 당당한 태도가 좋은 작용을 한다고 여기지는 않아요. 상대하는 상대의 진면목을 알려면 찌질하고 약해 보이는 게 더 유용하거든요. 당당한 태도는 상대를 위압하거나 경계하게 만들 뿐이예요. 그야, 이건 제 생각(수법)일 뿐이예요.


 다니던 곳에 한 직원이 있었는데 나이가 꽤 있었어요. 몇 번인가 지나가면서 인사만 나누다가 어느날엔 내 테이블에 와서 20분정도 있다가 갔어요. 그 가게는 로테이션 바였는데 그 사람이 자리를 비우니 다른 직원이 저 사람은 딱히 지명을 해주는 사람도 없고 해서 테이블 땜빵을 주로 다닌다고 말했어요.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그러냐고 대답했어요.


 나와는 잘 맞지 않는 인간이었지만 그 직원에게서 느낀 건 당당하다기보다 당당함을 쥐어짜내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도저히 나쁘게 대할 수가 없었어요. 점점 나를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나다가 어느 날은 내 테이블에 와서 너무 죽치고 있길래 가 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알았다며 일어나려다 그냥 있으면 안 되냐고 하길래 어째 마음이 아팠어요. 그 다음부턴 가달라는 말을 안 하게 됐어요. 


 그 직원이 내 테이블에서 몇 시간씩 죽치고 있게 되자 다른 직원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진 거 같아요. 어느날 그들이 내게 와서 '저기 혹시 여은성씨 XXX 언니 좋아해?'라고 물었어요.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럼 왜 계속 냅둬?'라고 물어왔어요. 할 말이 없어서 '예쁘잖아.'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그들은 '와...취향 특이하다.'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어요.



 4.휴.


 

 5.어느날 그 직원이 무슨 말을 건려네다 말다 하는 느낌으로 쭈뼛거렸어요. 그야 이 직원이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이는진 알 수 있었어요. 바틀을 까달라는 거겠죠. 원래라면 안 샀을 술을 자신이 영업을 잘 해서 깐 걸로 장부에 올려 달라고요. 자신을 위해 바틀을 까주는 손님이 있다고 다른 직원들에게 보여주기도 하고요. 궁금한 건 그 말을 어떤식으로 전달할지, 그 방식이었어요. 직원이 입을 열었어요.


 '야, 나 오늘 위신 좀 세워줘.'


 라는 말이었어요. 나는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왜냐면 이사람도 잘 알거거든요. 저런 말은 영업도 뭐도 아니예요. 야구로 치면 스트라이크도 볼도 아니고 폭투죠. 이 사람보다 15살쯤 어리면서 강남 한복판에 자기 가게를 가지고 외제차를 두 대-내가 본 것만-굴리는 여자도 저런식으로 영업멘트를 치지는 않아요. 뭔가를 팔아 달라고 하는 순간만큼은요. 저런 식으로 뭘 팔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매상을 올려 줄 일 따윈 당연히 없죠. 아무리 특별해도요. 


 하지만  내게 와서 '취향 특이하다'라고 말하던 두 직원의 비웃는 표정이 자꾸 떠올랐어요. 나를 향한 게 아니라 이 사람을 향해 지었던 그 비웃음이요.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를 하며 그런 표정을 보여주는 이유는 하나잖아요. 네가 어울리는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평판이나 취급을 받는지 가르쳐 줄 테니 알아먹으라는 거죠. 


 그건 그들이 특별히 비열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건 아닐거예요. 사람들은 그들의 정글에서, 그들의 오아시스에서, 그리고 그들의 동굴에서 각각 다른 사람이 되니까요. 그리고 그건 그들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 정글에서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하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쁜 건 나쁜거라서 좋아지기 위해, 그 직원의 폭투를 스트라이크로 인정하기로 했어요.



 6.어차피 팔아 주기로 한 김에...마음대로 골라 보라고 하면 대체 어디까지 부를지 궁금해서 메뉴판을 펼쳐놓고 골라 보라고 했어요. 직원이 메뉴판 중간쯤에서 손을 멈추고 '이거 시켜줄 수 있어?'라고 물었어요.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아, 아니다'라며 손가락을 좀더 내렸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아니 사실은 이거 먹고 싶은데...'라고 하며 한번 더 손가락을 내렸어요. 아마도 내가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동안에는 계속 메뉴판의 밑으로 갈 것 같았어요. 그렇게 어디까지 가나 궁금했는데 결국 메뉴판의 맨 뒤에서 세번째 있는 술에서 멈췄어요. 


 메뉴판의 맨 마지막과 두번째에 있는 술은 매우 황당한 가격의 술이어서 그걸 찍었다면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끝에서 세번째에 있는 술도 충분히 황당한 편이긴 했어요.



 7.그날 가게가 끝날 때쯤 사장이 와서 '뭐 문제 없어?'라는 말로 운을 뗐어요. 그런데...이건 질문이 아니잖아요. 굳이 찾아와서 굳이 저런 걸 물어보는 건 이미 문제가 있다고 여겨서 물어보는 거니까요. 사장은 오늘 여기서 뭐 불편하거나 그런 일 없었던 거냐고 물었어요. 없었다고 하자 '아까 그 술은 왜 시켜줬어?'라고 물어 왔어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시켜줬다고 했어요. 그러자 사장은 '음...참 착하다.'라고 중얼거리고 가게를 마감하러 갔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이건 장기적으로 좋은 작용을 했어요. 그 직원은 얼마 후 그만뒀고 그 후로 2년 정도 지났는데 그 가게에서 틱틱거리는 말을 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을 해도 사장은 매번 '이 사람은 말은 그렇게 해도 좋은 사람 맞아.'라며 나를 두둔해 줬어요. 사실 내가 비아냥거리기 시작하면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 같은 건 전혀 없거든요. 그래서 그때 일은 정말 잘 한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곤 해요.



 8.'틱틱거리면서 좋은 사람 취급 받기를 기대하는 건가?'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건 그냥 나오는 거예요. 그 직원이 자신에게 없는 걸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쥐어짜내다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 튀어나와버린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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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서 뭘 하다가 잘 타이밍을 놓쳐서 예전에 임시저장해 뒀던 글을 하나 올렸어요. 위에 쓴 대로 이 글의 사람은 다시는 언급되지 않을 거 같아서 닉네임을 안 정했어요.








    • 업그레이드를 내맘대로 시키며 사는데 되는건지 그대론지 모르겠군요.


      남 따라 하는 것 밖에 모르니 영원한 초보지만 그래도 초보시절 난감한거와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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