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에 올려보는 근황

0. 0에 대하여

저는 글쓸 때 번호를 다는 게 너무 좋아요.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좋아요

그중에서도 0으로 시작하는 건 특히 더 좋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쌓아올리는 기분이 들곤 해요.

0으로 시작하면 1이 아니기에, 본문과 상관 없는 어떤 이야기를 써도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앞으로 이어질 지난하고 난삽한 제 글을 끌어내기 위한 아무말이라고 해야 할까요.



1. 그러니까 진짜 근황

사실 현 듀게분들 중 몇분은 이미 알고 계시지만

지난 10월 초 있었던 만 29일 생일 이후로 제 인생의 많은 것들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정신과 진단을 받고 F64.0 진단코드를 받아냈으며, HRT를 시작했죠.

세 번의 데포 주사와 매일 두 알의 안드로쿨을 먹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몸의 변화는 빨라서

하루하루가 다르네요. 한 시간만 걸어도 2,3시간 걸었을 때와 비슷한 강도의 피로가 오고,

정수기 물통은 하루가 다르게 무게감이 달라요.

아침에 일어날 땐 온 몸을 침대에 묶어놓은 것 같아요. 릴리풋에 꽁꽁 묶인 걸리버마냥요.


가족에게는 따로 얘기하지 않다가 동생에게만 겨우 얘기했어요.

개신교 전통이 강한 집안 풍토상 앞으로도 얘기하기가 썩 쉽진 않을 것 같아요.

동생도 굳이 얘기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구요.

사실 저도 들키면 들켰지(혹은 안 보면 안 봤지) 힘들여 얘기하고 싶지는 않은 상태예요.


그래서, 수술이나 성별정정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야 하고싶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는 우선 크게 필요가 느껴지진 않아요.


2. 젠더퀴어

사실 저는 제가 제대로 진단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렸을때부터 나는 여자야, 같은 생각은 사실 못 했어요.

(그러면서도 여자 몸을 동경하기는 했죠.)


그럼에도 성별불쾌감은 극에 달해서

멋대로 피임약같은 걸 자가처방해보기도 했고요. (혹시나 하는 얘기지만 하지 마세요 ㅋㅋㅋ)

그러면서도 꽤나 오랫동안 내가 뭔가 다른 것 같은데 뭘 어떻게 다른건지 또렷하게 알지 못했어요.


극히 최근에야 젠더퀴어라는 개념을 알게됐죠.

그건 꽤나 낯선 경험이었어요.

그동안 저는 단순한 남/녀 이분법 뿐만 아니라

모든 카테고리화가 무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각자가 각자일 뿐인 상태를 억지로 묶어놨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처음 젠더퀴어를 알게되자 처음 안도감 같은 걸 느꼈어요.

이 세상 어딘가엔 나랑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


지금은 스스로 안드로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게 꼭 백프로 들어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저는 남성성/여성성을 모두 갖겠다기보다는

여전히 둘다 모호하게 느껴지니까요.



3. 이쯤에서 염장타임

정신과 상담을 받기 직전,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와 급속도로 친해졌습니다.

나이는 분명 여덟 살 어린데, 어리다는 느낌은 한 번도 못 받았어요.

어느순간 'ㅇㅎ오빠'보다 'ㅇㅎ이'가 더 편하고 자연스러워졌어요.


전 애인과의 상처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그냥 그런 걸 전부 덮고 교제를 시작했어요.


그냥 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준다는 게 제일 좋아요.

오빠취급 해주지 않는 것도요.



4. 문제는 직장

사실 다른 건 별 걱정이 없는데 문제는 직장이에요.

은근히 약빨이 잘 들어서 벌써부터 몸이 꽤나 많이 변했는데

날씨가 풀리면 어떻게 될 지...괜히 소문나기 전에 관 두고 싶은데 현재 있는 선배들이 주루룩 나갈 계획중이라...

어찌될지 모르겠어요. 

탈출하고 싶은 맘에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꿈인 등단을 위해 열심히 작품을 쓰.......려고 했으나

밀려드는 일거리에 몇달째 진척을 못 하고 있네요.

다음 직장은 꼭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맞는 곳으로 정하겠다는 소박한 꿈만 있는 실정입니다.(ㅋ)


현 직종 자체가 워낙 특이한데다 업계가 좁고, 괜히 이런저런 소문에 휘말리는 건 또 싫은지라...

경력을 살려서 이직할 수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ㅋㅋㅋ


 

5. 지금에 와서 적어보는 이유

저는 딱히 이 글이 커밍아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 제가 오랜기간 숨어 지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것도, 공감을 사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어떤 듀게 회원분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앞으로도 일상이 계속되겠다'고 하셨어요.

네, 이 글은 그저 늘 어디서나 있는 일상이라고 생각해요. 문자 그대로의 바낭이죠.

시국이 흉흉한데, 너무 바낭성 글이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6. 사실은

사실은 지금도 아침까지 끝내야 할 원고가 있어요.

진도가 안나가는 김에....적어 봤어요.

글 자체야 꽤나 전부터 쓰려고 했지만요.

여하간, 아마 없으시겠지만 혹시나 제 근황이 궁금하실 분이 있으실까 싶어 적어보았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고, 행복한 한해 마무리 되시길.


      •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 힌트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행복해지시기 바랄게요
      • 감사합니다:D

        베르터님도 더 행복해지시기 바랄게요!!
    • 일상에서의 행복들 잘 챙겨드시길 빌겠습니다
      • 고럼요!! 그러고 있습니당 :D

    • 만 29세라는 글자에 눈이 확 가요. 새 인생을 시작하기에 참 적절한 나이입니다(부러워~)
      • 앗, 그런가요. 더 어렸을때 결단하지 못한게 조금 아쉽던 걸요 ㅋㅋㅋ



    • 치료가 여러 모로 힘드시겠지만 곁에 소중한 분이 계셔서 다행이군요. 올 연말은 따뜻하시겠어요.
      • 딱히 힘든 건 없는데 일은 좀 쉬고 싶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물휴지님이야말로 따뜻한 연말(...) 아닌가요

        • 어떻게 아셨는지! 새로 구매한 온수매트와 거위털이불 덕에 따뜻한 연말 보낼 것 같습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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