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정답)
1.평소에 심심할 때는 결혼을 하고 가정이라는 걸 가지고 싶다가도 냉정함이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아니예요. 현대의 가정이란 곳은 남자 가장에게 있어 정원도 아니고 왕국도 아니거든요. 뭐 대체로 말이죠.
애초에 가정을 '가진다'라는 말 부터가 잘못됐네요. 가정을 가진다가 아니라 가정을 '짊어진다'가 옳은 표현일 거예요. 내 주위를 보면 말이죠.
나는 어딜 가든 그렇게 보여지고 싶은 곳에선 좋은 사람으로 통하곤 해요. 문제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어서 좋은 사람으로 통하는 건 아니거든요. 좋은 사람을 연기해 낼 만한 여력과 여유가 어쨌든 남아돌기 때문에 좋은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가정이라는 걸 짊어지게 되면...가정은 나의 좋은 사람 코스프레 용량을 분명히 뛰어넘어 버릴 거라는 생각이 늘 들어요.
sbs스페셜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언젠가 말한 아저씨의 철학이 옳은 것 같기도 해요.
2.언젠가 언급한 아저씨가 가진 공포는 늙음이예요. 정확히 말하면 아저씨는 늙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예요.
아저씨의 소일거리는 욕구의 해결이거든요. 자꾸 아저씨라고 부르니까 헷갈릴 것 같은데 사실 그는 젊은 편이예요. 젊기 때문에 전날...또는 새벽까지 미친듯이 놀고 체력이 바닥나서 잠들어도, 다음 날이면 활력과 욕구가 다시 100%에 가깝게 리필되어 있죠. 하루 정도 쉬는 날은 있어도 어쨌든 다시 낮에 이런저런 일과를 보고 운동도 하고 그러다 보면 다시 밤이 와요. 그러면 아저씨는 나와 만나서 술을 먹거나 아니면 혼자 어디 가서 재밌게(그의 기준에서) 여자들과 놀고 또 새벽에 들어오는 거죠. '혼자서 여자들과 논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뭐 그래요.
그러니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 만으로도 아저씨의 하루는 그럭저럭 잘 가는 거예요. 딱히 스스로 취미를 만들거나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는 거죠. 그날그날 리필되는 욕구를 상대를 바꿔가며 해결하는 걸로 그날을 즐겁게 보내면 되니까요. 매일 새로 갱신되는 온라인게임의 일일퀘스트를 하는 것처럼요.
3.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일주일에 여섯 번 놀 수 있던 게 다섯 번...네 번...세 번... 두 번...이렇게 줄어들게 될 거란 말이죠. 욕망의 배터리가 충전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질 거니까요. 아저씨가 두려워하는 건 그런 날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거예요. 사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아저씨에게 닥쳐오고 있는 중이죠. 그리고 아저씨의 문제는, 그런 날이 닥쳐왔을 때 아무것도 안 하고 혼자 있게 되는 날이 정말 견디기 힘들 거라는 거예요. 아저씨에겐 그럴듯한 인간관계도 취미도 없거든요.
그야 그렇다고 해서 뭐 아저씨가 그런 날을 대비하지는 않아요. 음악을 배우거나, 연극 동호회에 가거나 하지 않죠. 그런 걸 질색해하거든요. 돈이 될만큼 잘하지 못하는 걸 시도하는 것 자체를 혐오해요. 그냥 가끔씩 정신이 들 때 미래를 불안해하는 정도예요.
4.휴.
5.어쨌든 아저씨의 철학은 아직 그럴 수 있을 때 오늘을 재밌게 살자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말이죠. 뭐...오늘 하루만 보면 그게 정답이긴 해요. 그러나 가끔씩 불안한거죠. 오늘 하루를 불살라 버리는 건 오늘 하루로만 보면 최고의 정답을 내는 거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인생 전체로 보면 가정을 가지는 게 맞을지도 모르죠. 인생이라는 문제집을 끝까지 푼 게 아니어서 문제지만요.
6.'그럼 가정이 인생에 필요할지 아니면 필요없을지 알 수 없으니 보험삼아 가정을 가져보는 게 어때?'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빌어먹을! 가정이라는 건 보험이 아니거든요. 보험금이라는 건 적절한 가액이 산정되었기 때문에 성립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가정이라는 건, 제대로 운영하면 한 달에 200만원을 벌어도 거의 다 쓰게 되고 한 달에 1000만원을 벌어도 거의 다 쓰게 되는 마법의 항아리 같은 거예요. 밑바닥이 뚫린 마법의 항아리 말이죠.
왜냐고요? 가족들에게 나는 자판기 같은 존재가 될 거고, 가족들은 나라는 자판기를 계속 두들겨댈 거거든요. 더이상 자판기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말이죠. 그러니까 자판기 안에 얼마를 채워두든 그 자판기는 무조건 다 털리는 거예요.
누군가는 이러겠죠. '헛똑똑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군. 오지도 않을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어.'이라고요. 아니예요. 내가 비록 드라마를 통해 많은 걸 배우긴 하지만 이것만큼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배운 거예요.
7.이 글을 보면 누군가는 이럴지도 모르죠. '야아...이 사람은 정말 모든 걸 자신에게 행복이 될지 되지 않을지로 판단하는구만.'라고요. 하지만 아니거든요. 나는 이기적이긴 하지만 책임감이 뭔지는 알아요. 가족을 가지게 되면 자의식을 줄이고 가장 연기를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겠죠.
나는 가정을 가진다면 가족 구성원의 인격이나 복지의 맥시멈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우울한 미래를 그리는 거예요. 위에 자판기 얘기를 웃기게 쓰긴 했지만 어쩔 수 없어요. 누군가를 위한 자판기 노릇을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예요. 그리고 가정에서 누군가는 자판기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힘든 일을 하는 건 나 한명뿐인 게 가족을 위해 좋은 일이고요. 가족을 가지게 되면 가끔 바에 가도 기껏해야 발렌마스터즈나 간신히 먹겠죠. 아니면 그조차도 못 먹거나요.
그리고 이런 상상을 하다가 우울해지는 이유는 이거죠. 가족들도 나의 인격이나 복지의 맥시멈을 염두에 둬 줄지요. 그것의 답을 찾기 위해 주위의 가정의 모습들을 보면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버전의 평행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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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연속 sbs스페셜을 보고 정말 무서웠어요. 몇몇 장면은 장르가 호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그걸 보고 나니 결혼한 버전...즉 가장 버전의 내가 가족들에게-
'여보, 얘들아 오늘은 가족회의라는 걸 해보지 않을래? 가족의 가치...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전통, 존경심...뭐 그런것들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자꾸나?'
...라고 하면 '자판기가 말도 하네?'같은 무시하는 반응이 돌아올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공감되네요.
계산 방식에 동의합니다 권하지는 않치만요.
똑같은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