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그릇>을 읽고 소설의 시점에 대해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 1, 2>를 다 읽었어요.


지난 주 화요일에 1권을 3~4시간에 다 읽었고, 수요일에 2권을 3~4시간에 다 읽었으니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소설로는


정말 드물게 술술 잘 읽히는 책이었죠. (참고로 저는 2권의 220페이지에서 범인이 누군지 알았어요. ^^)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왜 이 소설이 세계문학전집에 실려 있는지 솔직히 좀 의문이었어요.


해설에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나름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지만 제가 읽은 느낌으로는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담겨있지도 않았고, 제가 세계문학전집 소설에서 기대하는 인간 본성의 해부라든지 삶에 대한 통찰이라든지


마음 속을 파고드는 아름답고 강렬한 묘사라든지 그런 걸 발견할 수도 없어서 재미는 있었지만 읽고나서 좀 허무했거든요. ^^


그런데 읽으면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의 시점이에요. 옛날 국어시간에 배운 기억으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일종인 것 같은데 마치 한 무대에 있는 몇몇 주요 인물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번갈아가며 비추듯이 얘기를 진행시켜나가요.


처음엔 주인공인 경찰 이마니시의 상황,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대해 한참 얘기하다가


그 다음엔 OO의 입장에서 한참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엔 XX의 입장에서 한참 얘기를 하고, 그런 식으로요.


그래서 독자는 각 인물들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갖게 되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소설을 읽게 되죠.


물론 미스터리인 만큼 누가 범인인지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고 2권 후반부터는 경찰 이마니시가 보거나 알게 된 것에 대해서도


독자에게 다 알려주지는 않지만 초반부터 독자는 꽤 많은 정보를 갖고 나름대로 추리를 하게 돼요.


그렇지만 독자가 가진 정보 때문에 어떤 인물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초조해지는 상황은 없어서 서스펜스 소설은 아니고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해 나가면서 주인공이 생각하고 알게 된 내용만 제한적으로 독자에게 보여주었던 <스밀라>와는


같은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독자가 얻게 되는 정보의 양에서 다른 것 같아요.


(제가 안 읽은 <스밀라>의 뒷부분에서 다른 시점이 등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추리를 해나가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과 여러 인물들의 상황에 대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제시하는 것 중


어느 방법이 미스터리 소설에서 더 일반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자인 제 입장에서는 확실히 독자에게 정보를 많이 주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이 더 재미있고 술술 읽히네요. 제가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머리를 쥐어짜면서 추리할 수 있으니까요.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주인공 이마니시가 어떤 위험에 처할 것을 독자가 미리 알고 안달복달하게 만들었다면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이 돼서 더 재밌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저는 미스터리의 해결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보다는 어떤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물의 심리나 사회적 상황을


파고들어가는 소설, 미스터리 형식/서스펜스 기법을 이용해서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분석하는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커요. 이런 소설은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


(갑자기 이런 추리소설의 최고봉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불끈~~


이 소설이 아마 전지적 작가 시점의 미스터리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번에 <모래그릇>을 읽다보니 확실히 저는 독자에게 정보를 많이 주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정보를 주는 방식도 간접적으로 천천히 주는 것보다는 초반부터 대놓고 왕창왕창 주는 방식을 좋아하고요. ^^


그래서 관찰자 시점보다는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한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보다는 여러 사람의 관점으로 제시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싶은데... (이제까지 시점에 신경 쓰면서 읽은 소설이 별로 없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소설들을 관찰자 시점, 주인공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등으로 구분해서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다면


한 번 그 구분에 따라 읽어보고 소설의 시점과 제 취향과의 관계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소설 <모래그릇>은 재밌게 읽었는데 지금 갑자기 왜 제목을 <모래그릇>이라고 했는지 의문이 생겼어요. ^^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래성 같다는 의미로 그렇게 지은 건지... 소설 속에는 딱히 모래그릇과 관련되는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



설 연휴 동안 뒹굴뒹굴 놀다가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집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에 실린 짧은 소설 두 편을 읽었어요.


'제4호 부검실'과 '검은 정장의 악마'를 읽었는데 저는 '검은 정장의 악마' 같이 어린아이의 공포를 환상적으로 그린 소설이


재밌더군요. 영화의 경우에도 <사냥꾼의 밤>의 무시무시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 <위대한 유산>이나 <앵무새 죽이기>의


초반에 어린아이들이 나오는 뭔가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공포의 분위기를 좋아해요.


이 책은 단편 모음이니까 제목 보고 마음 내키는 대로 몇 편 더 읽어볼까 해요.



1월도 가고 이제 소설은 그만 읽을까 했는데 몇 주 전 희망도서로 신청했던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정영목 번역)이 도착했으니


빌려가라고 오늘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네요. 이렇게 책 읽으라고 도와주니 이번 주엔 <제5도살장>을 읽을 수밖에 없겠어요. ^^


제가 원래 미스터리나 SF 소설 취향이 아닌데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별로 안 읽었으니 취향이 아닌지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


이번엔 이런 쪽 책을 읽어보라고 뭔가 우주가 도와주는 느낌이에요. ^^



날씨가 춥네요. 좀 늦었지만 듀게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문학 용어로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고, 글쓴님이 설명하신 서술 시점을 저는 제 맘대로 부분적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불러요. 
      XX의 관점에서 서술될 때 나머지 인물들의 관점이나 심리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XX의 내면 묘사는 전지적이지만 00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관찰자가 됨)  
      제한된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요즘 소설들은 대부분 그렇게 인물별로 돌아가며 나오는 3인칭 시점 방식으로 서술되는 것 같습니다.
      단편의 경우엔 여전히 1인칭 시점이 많이 사용되지만, 장편의 경우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면 몰라도 본인이 액션이나 플롯을 주도하지 않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은 아무래도 정보 전달에 한계가 있어서 이야기를 길게 풀어나가기 힘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앗, '부분적/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표현이 몹시 적절한 것 같아요!!! ^^ 모든 게 다 드러나 있는 완전한 전지적 작가 시점은 또 아닌 것 같아서 이런 시점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좀 애매했는데 그런 표현이 있었군요. 저는 요즘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은 거의 없고, 좋은 평가를 받는 소설들은 대부분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주인공이 3인칭으로 나오고 직접적인 심리 묘사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제가 모르는 부분적/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이 많이 있나 봐요. ^^ 앞으로는 소설을 읽을 때 어떤 시점인지도 주의깊게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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