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오렌지 이스 더 뉴 블랙, 시즌 1.
작년 말에, '실생활에서 고통이란 말을 그렇게 자주 쓰는 사람은 처음이야'란 말을 들었습니다. 그걸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의견은 두 명 이상한테 들은 것 같군요. 새삼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더군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제 미학은 꽤 오랫동안 고통에 의존해왔다고도 할 수 있겠더군요. 아마 전에 썼던 글들 중에서 한 번 이상을 설명하기도 했었던 것 같구요. 제가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창작물은 '고통을 세심하게 잘 다루는' 작품들이기도 하구요. 보통 '양질의 고통을 제공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는지 좀 고민해봤습니다.
제게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문장은 애정어린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며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담담하게 사실을 읊죠리는 거죠.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하다는건 자명한 사실일 뿐이고, 공간과 시간처럼 그것을 받아들이는게 제 1법칙입니다. 그냥,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거에요. 특히 한국에서는 말이죠. 저는 가끔 새로운 문제로 인해 스트레스 받는 친구에게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한국에는 고통배급기구가 있어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고통을 나누어주고, 누군가 고통이 부족하다 싶으면 신속하게 채워준다.' 그래서 뭔가 자잘한, 그러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에는 고통배급...'이라고 냉소하는 거죠. 도무지 누가 적당히 균형에 이르는걸 두고보지 못하는 듯해요. 어쨌든,
그런 세계의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선을 잘 잡아낼 때, 저는 창작에 침잠하게 됩니다. 누구나 감정적으로 힘들 때가 있지만, 보통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힘들지 않아요. 아주 복잡하고 다면적으로 힘들죠. 어떤 창작에서는 별로 똑똑하지도 능청스럽지도 못해서, 아무거나 크고 강렬한 걸 휘두르면 쉽게 표현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힘이란 것이 단면적이고 무식하게 그려진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것들이 제대로 표현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리저리 널려있는 수 많은 타자의 고통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훨씬 섬세하고 치밀하게 특정한 순간을 그려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그런 면에서 [아가씨]의 마지막 고문장면을 싫어합니다)
[오렌지 이스 더 뉴 블랙]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양질의 고통을 제공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잠깐 고통 탐지기를 떠올려 봤습니다. 가이거 계수기처럼 생겼는데, 눈금에 숫자 대신 작품명이 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릭과 모리], [보잭 홀스맨] 순으로 쓰여있고, 최고 수위에는 [한공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딘가에 [트루 디텍티브] 놓아야 할 것 같은데 어디가 적당한지 모르겠군요) 보통 그러한 종류의 작품들을 보기 시작하면, 바늘 대신 마음이 미동을 하며 각각의 작품들 사이를 지나다니겠죠. 저는 [오렌지 이스 더 뉴 블랙]을 처음에는 작은 시트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서서히 높아져가는 고통의 밀도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서야 잠시 작품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냥 이런 것입니다. 군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내무생활을 꽤나 잘 이해하는 방법은 [오렌지 이스 더 뉴 블랙]을 보는 것이라는 거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좀 더 설명해보죠. 군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곳은 복선으로 가득하다.' 군대의 거의 모든 결과는 그 때에는 눈치채기 힘들지만 나중에는 명백해지는 징후들 이후에 나타납니다. 지나치지 말았어야 할 단서들, 무시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킵니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작은 구역에서 상호관계를 맺기 때문에 작은 상징들도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런 끊임없는 연쇄작용과 불균형, 액체와 고체 사이의 분자구조 같은 서사가 군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양질의 고통을 제공하는 작가들은 절대 성급하지 않습니다. 서서히 호흡에 맞춰 시공간을 데워나갑니다. 글쎄, 저는 펑하고 터트리는 사람은 그렇게 좋아히지 않나 봅니다.
흠, 도대체 이런 작품들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왜 저는 이런 것들을 꾸준히 바라는 걸까요. 삶의 위안 따위 전혀 되지 않는 것들. 저는 마냥 괴롭히고 괴롭혀지는 것들이 좋을 뿐일까요. 저는 이제 이름을 언급하기 좀 힘들어진 어떤 작가의 한 컷 나레이션이 떠오릅니다. '불쌍한 나의 피조물들.' 명백히 제 4의 벽 바깥에서 작가가 말을 해버린 순간이었죠. 어쨌든 분명한건, 제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삶을 버텨나갈 원동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위안? 오, 그럴리가요, 전혀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냉정하게 이런 생각을 하긴 하지요. 적어도 이런 세계라는 것을 물리법칙으로 받아들여야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요. 이상적인 상황을 상정해서는 우울해서 버틸 수가 없을 겁니다. 원래 이런 뭣 같은 세계니까, 좀 더 나은 일을 하거나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을 써야 하며, 그 힘의 대부분은 당연하게도 여기저기로 누수되어버린다는 것을요. 다들 그렇게 삶을 버텨나가는 것만으로 잘하고 있으며, 쓰다듬 받을만한 자격이 된다는 것을요.
모든 것은 언제나 미완성 상태에서 미완성 상태로 나아갑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시간 안에서 살 수 있는거죠. 후유,... 시즌 2를 볼 때가 되었군요.
P.s. 고통 계수기를 떠올리는데 예상외로 눈금에 넣을 영화들이 떠오르질 않아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백치], [멜랑콜리아], [도그빌]... 김기덕 영화를 아직까지 하나도 안 봤다는게 신비하긴 하군요.
포털 뉴스를 보면 억울하게 죽어 귀신이 될 사람들 소식이 끊이없이 이어지죠.
세상이 커져 인터넷이 없을 때 보다야 그런 일들이 많겠지만
이런 뉴스들을 보고 살아야 정상인지 아예 안보는게 좋은건지 분간을 못하겠어요.
김기덕 영화는 잔인한 장면이 많죠 감독의 생에 대한 시선이니 그렇겠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최근 그물이란 영화가 있는데요 역시 김기덕에 내재되어있는 영화의 b급 정서는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이게 북한쪽의 북한쪽 사람들의(류승범까지 제외) 영화적 표현에만 해당된다는거죠.
김기덕의 한계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영화의 반이 그러니 대단하다고 해야겠죠.
방금 그물을 봤다는 좀 지난 듀나님 트위터를 보니
정하담 배우도 나왔고 김수안 배우도 나왔다는데 나도 끝까지 잘 봤는데 헛봤나.
성현아 나온걸 알고요.
최근 영화 중에서는 Moonlight가 고통에 대해 섬세하게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Silence는 고통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요.
Lars von Trier 감독의 영화 중에서는 Breaking the Waves(1996)도 고통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고
Kieslowski 감독의 10부작 Dekalog(1989)도 고통에 대해 잘 보여주는 것 같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서는 <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시간>, <숨>이 생각나네요.
4 Months, 3 Weeks, and 2 Days(2007)도 꽤 고통스러웠던 것 같아요. ^^
Mike Leigh 감독의 영화들도 고통을 잘 보여주는 것 같고요. Naked(1993), Another Year(2010) 등
쓰다보니 인간의 고통에 대해 다루지 않고 위대한 영화가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물론 제 기준이지만 ^^)
이창동 '시', 김기덕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둘 다 힘들었어요. 어머니께서 고통스런 영화를 즐기시는지라 함께 보느라 고생이었죠.
underground_ 문라이트가 아카데미 상을 받았더군요. 보러갈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습니다. 추천작들을 조용히 통에 넣어놓는답니다.
물휴지_ 고생하셨군요. 힘든 영화들을 함께 봐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많이 고마워합니다. 어머님은 어떠실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