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도 제 그림자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중년
성냥갑을 흔들어본다
텅 빈 것을 알면서도, 혹시
무슨 소리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귀 기울여 흔든다, 혹시
무슨 불타는 소리가 조금쯤
남아 있지는 않을까
문단속을 안하면
악몽(惡夢)을 꾸는 나이
죽어가는 나를 사람들이 지나치고
소리 없는 고함 지르다 깨면
배개 젖어 있는
여기는 또 다른 늪
그런 밤, 서성거리다 가끔
책상에 앉는다
텅 빈 것을 알면서도 혹시
무슨 낙서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색 바랜 원고지
글씨 번진 편지봉투와 감춰둔 유인물
한때의 것으로 돌리던 모든 것들을
자리를 바꿔보다가
고개를 꺾는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무슨 눈뜨는 소리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무슨 꿈틀거리는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 우상호 에세이집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p.290
헌책방에서 우연히, 작년에 출간된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의 에세이집을 하나 발견해 업어왔습니다.
표지 디자인 상태를 봤을 때 많이 팔리라고 낸 책은 아닌갑다 싶기도 하고(내가 해도 포토샵으로 15분이면 만들게 생김..)
우연히 발견한게 정두언 4집 앨범이거나 그랬다면 궁금할 일도 없었겠으나.. 책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열 몇 편의 자작시가 있어서였어요.
기형도의 후배, 공지영의 친구이자 시인을 지망했던, 그리고 맨앞에서 이한열의 영정을 들었다던 정치인의 감수성은 어떤건지 좀 궁금하더군요.
시는 다수가 학생 때 문학상을 받았던 작품들로 보이는데 뭐랄까, 개인이 시대에 영향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그 시절에 쓰여진 글들을 관통하는 짙은 정서란 참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 중에서 교내 게릴라 시위가 벌어져 주동자가 거칠게 연행되어 가면, 수백명 학생들은 둘러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 누구도 나서지 못했고, 그런 날 저녁이면 주변 술집들은 학생들로 북적이곤 했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이제 누구든 거리에 나가도 맞고 끌려가지는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딘가에서 제각기 한 잔 씩을 기울이며 시절을 지켜보는 나날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무들도 제 그림자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거기
어두운 구석 웅크리고 앉아
바닥을 쓰다듬고 있는
너의 무릎은 온통 상처투성이
홀로
어둠 속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어린 산짐승의 눈빛처럼
거리엔 눈물 넘치고
가지고 싶은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니, 이젠
눈길을 끄는 제 향기마저
돌보지 않는구나
아아, 헛된 집착들아
그리움들아
무엇을 두려워 하느냐
빛나는 모든 것들은
어둠을 건너왔느니,
젖은 들판 더듬어보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것들이 아직
네 안에 남아있다
무릎을 펴고 일어나
창밖을 보라
불빛 희미한 거리
나무들도 제 그림자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p.292
우상호 원내대표가 시인이었군요. 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