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느낌을 소설로(스포일러..?)
네 그 일본영화 환상의 빛입니다. 영화를 보고 들었던 느낌을 일반적인 글이 아니라 소설 형식으로 한 번 써보고 싶었어요.
이걸 창작이라고 해야 하나 리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애매한 느낌이 들었어요.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아, 근데 생각해보니 환상의 빛 내용이 들어가네요. 안 보신 분은 조금 위험하실 수도.
아무튼, 어쩐지, 나이를 들면서 우울함은 더 배가되는 것 같네요.
오후 세시, 나는 우리 학교 영화관 앞에 앉아 있었다. 예술영화만을 주로 상영하는 이 영화관은 내가 우리 학교를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다.
영화관 옆에는 식당이 붙어 있다. 이 식당 앞에 빈 탁자가 열 개 정도 놓여 있다. 나도 거기 있었다. 여느 때처럼. 조명이 그리 밝지 않은 이곳은 기본적으로 조용하다. 하지만 웅성거리는 미약한 소리들 때문에 아주 조용하다고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본 수많은 영화들, 같이 봤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랑과 우정, 기대와 허무, 슬픔과 기쁨이 다 배여 있는 이곳에서 나는 영화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거운 가방은 옆에 내려 두고 공허하게 앞을 응시했다. 사람들이 보이는데 물건처럼 보인다.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움직이는 물건들은 하나의 고정된 형식처럼 비슷하게 앉아 있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등, 꽤나 모두들 진부하게 살아있다. 그런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전화로 통화를 하는 줄 알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한 여자가 공책을 북북 찢어대고 있었다. 전화기는 없었다. 혼자 열심히 공책 종이들을 찢어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으레 공부하나 싶어 관심을 껐다. 하지만 이상하게 계속 걸렸다. 할 게 없어 아예 몸을 돌리고 그녀를 계속 쳐다봤다. 나는 공책을 가로로 거침없이 찢어대는 그녀를 보며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섹스하는 상상을 했다. 평범한 아줌마인 그녀의 몸매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그맣고 밋밋한 몸매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정성껏 핥는 상상을 했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내 성욕이 끈적였다.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드디어, 나를 보더니 내가 있는 탁자에 당연하다는 듯이 합석했다.
“저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무엇이요? (내 만면에는 환대의 미소가 가득했다. 괴로워하는 그녀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작게 중얼거렸는데, 얼마 안 가서부터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말했다. 하지만 주변에 그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은 태엽이 감겨 일정하게 돌아가는 인형들 같았다. 이 거대한 기류를 거스르는 이는 나뿐인 것 같았다.
실상은 별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심심했고, 그녀가 궁금했다. 그게 내가 그녀를 그 순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다. 나는 그녀의 사연을 알고 싶었다. 내 진심이 전해졌기에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이가 왜 죽었는지 말이에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세요. 그 때 일을 말입니다.”
“네, 알겠어요, 그 때 일을 말해보겠어요. (그녀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옛날 일을 기억하는 것은 그녀에게 언제나 괴로운 일일 터- 그녀의 주름이 파였다. 송충이 눈썹이 일그러졌다.) 제가 갓난아이를 낳은 지 3개월 만에 그이가 죽어버렸어요. 경찰이 제게 말해주기를 그이가 성큼성큼 잘도 기차를 향해 걷더랍니다. 겁도 없이 말이에요. 그런데 기가 막힌 건, 그가 아무 낌새도 없었다는 거예요. 죽기 전까지 말이에요. 죽고 싶다는 말도 안 했어요. 우울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조금 건조해보였지만, 선생님 아시다시피, 그이는 원래, 그렇게, 건조했답니다!”
“그랬군요...”
“한 마디 유언을 남겼다면... 이유를 한 마디라도 남겨주기만 했다면... 왜 그랬을까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을까? 한 번 상상해보자. 내가 자살을 할 예정이다. 나는 자살을 아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고, 나와의 사랑에 빠져 행복한 마누라도 있다. 그런데 왜 죽었을까? 왜 기쁘게 죽었을까?
“지겹지 않았을까요?”
“뭐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매우 커졌다. 입도 벌어졌다.)”
“일상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죽어버린 것 아닙니까?”
“그 일상에는, 그이 아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외친 그녀는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가파르게 호흡을 헐떡였다.)”
아들이라... 자식이, 가족이 우리 삶에 그렇게 중요할까? 많은 사람들은 가족과의 유대를 뭐 아주 큰 것이라도 되는 냥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어떤 사람들한테는 그저 공허한 단어다. 감정, 무엇을 정말 어떻게 느끼는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다!
“아들 있는 게 대수입니까?”
그녀는 거의 졸도 직전이라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속으로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라고 외치는 게 보였다.
“아들을 사랑했습니까? 아들을 보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즐거워 보였어요?”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전형적인 반응이다. 불확실해지면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 아들과 그 삶을 사랑한 건 당신뿐이었겠지...) 그는 자전거를 사랑했어요.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걸 좋아했고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죠... 그는 자전거를 타고 많이 돌아다녔어요.”
“그랬군요... 직업은 좋았습니까?”
“아니요, 평범했어요. 공장에서 일했어요. 돈을 많이 벌지 않았고요. 우리는 부자가 아니었어요. 건너편 방에서는 나이 드신 부부가 듣는 라디오 소리가 죄다 들렸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불평한 적 없어요. (죽을 만큼 싫었겠지만 체념한 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속으로 비웃었다.)”
“당신을 사랑했습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저 말이에요? 그것도 잘... 이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흐려요... 하지만 사랑했어요. 저 말고 다른 여자 없었어요. 우리는 동네 소꿉친구로 시작했어요. 그렇게 함께 자라서 자연스럽게 결혼했어요.”
나는 매우 짓궂어졌다.
“아, 그렇군요. 그 분의 삶과 일상에서 제일 큰 존재는 바로 당신이었네요. 얼마나 지겨웠을까.”
“네?”
“얼마나 지겨웠겠냐고요. 지겨웠을 거라고요. (나는 일부러 반복적으로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의 새파란 얼굴이 나를 너무나도 즐겁게 만들었다. 그녀의 생생한 감정, 그 터질 것 같은 감정, 흔히 볼 수 없는 그 내면의 아픔이 내 순간을 너무나도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다!) 좁은 집, 지루한 일상 속에 반복되는 당신의 그 못난 얼굴 말이에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얼마나 짜증이 났겠어요. 당신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기대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아마 마음 속 몰래, 당신의 그런 낙관주의를 지독히도 혐오하고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신과 자는 순간에도 그래요.”
“대체 어떻게요? (그녀는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제는 소리도 못 지르고 있었다. 위선자! 사실은 이런 대답을 누가 해주기만을 기다렸으면서!)”
“예를 들어 당신과 성교를 하는 중에도 아마 당신이 내지르는 교성이 싫었을 거예요. 아니, 아마 당신은 두 모습을 다 보였겠죠. 그 늙은이들이 있을 때는 쪽팔려서 소리를 죽였을 거고 없으면 보상심리로 내질렀겠죠. 생색을 내듯이 내지르는 그 교성, 그 헐떡임이 그의 귀에는 정말 끔찍이도 거슬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에서 당신의 생명력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에게 삶이란 계속 살아봤자 의미 없는, 진부하고 진부한 이야기였습니다. 더 살아봤자 기대되지 않는 것 말이에요. 아무리 해봤자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우울하고, 죽고만 싶은데 당신은 즐거워 죽겠으니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습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자신에 대한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겠죠. 자신의 진심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녀는 내 말에 완전 몰입했다.
“당신에게 자신이 죽고 싶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신의 그 생명력이 그 사람한테 옮아갔겠죠.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해! 이 아이를 봐, 그리고 나를 보란 말이야. 당신 그런데 왜 죽고 싶어 하는 거야? 어떤 식으로든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을 치료하려고 노력했겠죠. 하지만 당신 남편이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은 거예요. 죽기 위해서 그렇게 용의주도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술술 말하면서 무엇인가 즐거웠다. 이럴 때일수록 숨을 골라서, 차분히 말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모를 일이죠. 그렇게 자신이 우울했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당신을 보며 사랑에 빠졌을지 몰라요. 맨 처음에 말이죠. 그리고 그 사람은 모든 어리석은 연인들이 그렇듯 당신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완벽해지고, 행복해지리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과 삶을 지속해가며 그 환상은 철저히 부서졌겠죠. 당신도 언젠가는 그에게 한 조각 ‘환상의 빛’이었을 겁니다. 가고 싶은 길이었던 거죠. 그러나 그는 당신과 막상 삶을 살면서 그 길이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니고, 그 빛도 자기가 생각한 그런 빛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세상에서 그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돈을 벌었고,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충실했어요. 하지만 당신과 당신 아들이 얼마나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습니까. 모를 일이지만, 일이 끝날 때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그 사람 곁에 매번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가서는 같이 커피나 마시고 그랬겠죠. 그렇게 조금씩 그 분은 당신의 이기심과, 일종의 자신을 독점하고자 하는 야욕에 치를 떨며 당신을 증오했을 겁니다.”
냉정한 말이었을까? 이번에는 좀 따뜻한 말을 해볼까?
“하지만 너무 그를 미워하진 말아요. 그도 당신이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저 당신은 당신다웠던 것입니다. 어떤 도시에서 살았죠? 한 번 제가 맞춰볼까요. 사람이 드물고, 골목들은 삭막하고, 적막한 와중에 다소 침침한 조명들이 가득한 그런 도시였겠죠. 아마 그 사람은 그 도시가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기억을 떠올렸을 거예요. 당신을 지독히도 사랑해서 자신의 전부가 당신이었던 한때를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번 생에서 이 여자 말고 다른 삶은 없다. 그런데 내 유일무이한 이 삶은 어떠한가?”
“어떠한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줄 비참하게 흘러내렸다. 그녀가 내 말을 따라했다. 그 정도로 집중한 상태였다.)”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직장에 갔다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집 안으로 돌아가 지겹기 그지없는 당신을 보고, 그런 당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애벌레 같은 아들을 보고, 다시 잠에 들고. 그에게 그 모든 것들은 빛을 잃어버린 어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 최악인 것은 다른 삶도 다 헛수고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다른 여자랑 살을 섞는다 해도 그것이 좋아봤자 순간이고, 다른 아이를 낳는다 해도 그것이 좋아봤자 순간임을 안 것입니다. 그럴 때 당신 남편 분은 먼 곳에서 반짝이는 그 빛을 보고, 그 기차불빛을 보고 걸어가 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 때문이군요...!”
“흠... 아니요. (나는 살짝 당황했다. 이 여자 멍청하구만!) 제 말을 어떻게 그렇게 곡해해 들으십니까.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 때문인 거죠. 그 사람은 자신과 맞지 않은 삶을 훌훌 벗어 던진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에요.”
“제가 지루하지 않았다면... 제가 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면 그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나는 그녀를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여자의 착각이란 경멸스러우면서 사랑스럽달까.
“그 사람이 죽은 것을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돌려버리면 자학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 주변엔 이상하게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요...”
“말을 흐리지 마시고 똑바로 말씀해주세요.”
내가 단호히 말하자 그녀가 약간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실수로... 저희 집에 치매 걸린 할머니가 계셨는데 제가 그만 실수로 놓쳐버렸어요... 계속 고향 가신다면서 밖에 나가셨는데 제가 그 날 유독... 어쨌든 나가버리시고 두 번 다시 안 돌아오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녀는 거의 눈물 때문에 말을 제대로 잇질 못했다. 불쌍한 여자.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으니 말이다.
“이보세요, 의미 부여하지 마세요.”
엉엉 우는 그녀,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걸까.
“제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당신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때부터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당신이 뭘 했고 안 했고 상관없이 죽을 사람들은 죽고 살 사람들은 삽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이기적입니다. 그 사람들은 가고 싶어서 간 사람들이에요! 중요하지 않은 것에 계속 집착하니 당신이 애꿎은 공책들만 발기발기 찢고 있는 겁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들입니다. 당신이 겪은 일들이 평범한 일들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당신 너머의 일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은 당신이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해요. 누구도 이제 대답할 수 없는 것을 질문하지 마세요. 당신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그 사람이 왜 떠났을까, 그것들은 옳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럼 저는 대체 무슨 질문을 해야 합니까...?”
“흠, 아주 많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아들과 같이 무엇을 저녁으로 먹을 것인가 같은 것 말이지요. 아니면 이웃집 남자와 재혼할 생각이라든지, 좀 더 과감한 생각이라면 인터넷으로 다른 남자들과 채팅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녀가 너무 놀라 그만 울음을 뚝 그쳤다! 나는 설명이 더 필요하겠다, 생각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왜 놀라세요? 당신의 죽은 남편 따위 잊어버리세요. 당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길게 기억하고 있으면 되었어요. 그러나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신가요...”
“삶은 철저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분해되고 용해되고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라는 존재는 죽은 이후로 당신과 아무런 접점을 갖지 못합니다. 혹시 최근에 마음이 힘들었다면, 제가 추측하기로는 당신이 옛날 그 도시에 한 번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곳에서 그 음울하고 조용한, 당신과 당신 남편이 함께 했던 그 모든 것들, 하지만 사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라서 그것들은 모두 휘발되었고 없어졌지만, 당신 혼자서 아직도 지속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 남편! 당신의 남편을 그곳에서 만나고 온 거죠, 당신은! 착각입니다!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건 당신 마음 안의 남편뿐입니다. 즉, 당신이 만든 상(想)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지 않습니까. 당신 아들도 그렇고요. 이제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아, 이런 말들을 남에게 해주고 있지만, 나는 어떠한가.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이 공간, 이 익숙한 영화관, 내가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그 순간들이 이곳에 잔뜩 절어 지금도 계속 이 내 마음에 상영되고 있건만. 그 사람들은 아직도 죽지 않은 채 내 마음을, 내 가슴을 이렇게 절절히 하건만. 나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게 아니면 나에게?
“그는 가버렸습니다... 다른 빛을 보고 가버렸습니다. 당신의 죽은 남편이 지독히도 겁쟁이고 이기적인 것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를 탓하진 말기로 합시다. 그에게는 이 인생이 지독히도 허무하고 공허한지라, 당신도 거의 먼지덩어리였겠죠. 미안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적어도 자살했을 그 당시에는 말이지요. 그러니 제발, 그를 혹시 마음에서라도 조금이나마 미워한다면 미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세요. 그는 이미 죽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낭만적으로 보려고 합시다. 그는 당신과 이혼하고, 애를 버리고,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아예 죽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유일한 가능성이었기 때문에 당신으로 해결 안 된다는 걸 알고 죽어버린 겁니다. 비록 무의미한 삶이었을지 모르나, 그 삶 속에서 진정 사랑한 사람은 당신뿐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멎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여자란!
“저를 정말 가엾게 여기시는군요.”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물론이지요.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당신이 좋은 곳에 가서 재혼해서 새 삶을 일구길 바랍니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은 어떨까요? 분명 당신네 부부는 당신네만 거의 있는 한적한 도시에서 무기력하게 살았겠죠. 이제 그러지 마세요. 아이 손을 잡고 파도가 연신 넘실대는 넓은 마을로 가세요. 건장하고 튼튼하고 단순한 남자를 만나십시오. 삶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고,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평범한 사람 말입니다. 그게 바로 좋은 남자죠.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과 당신 아이를 잘 돌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매일매일 섹스도 해줄 거고요. 행복한 결말 아닙니까?"
나는 슬쩍 일어났다. 이제 할 이야기는 거의 다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인지 노파심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정말 그렇게 생각하진 말아요... 당신의 남편을 찌질이 정도로 기억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 죽은 남편은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상이 얼마나 진부합니까... 저는 정말 적어도 그 남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진부한가요, 저는 방금 전까지도 지루함에 몸서리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탈출구가 보인다면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이렌처럼 환상의 빛들이 저기 어딘가 반짝이며 울려 퍼집니다... 그 유혹에 마음을 죄다 빼앗겨 버린다고 해서 나약하다고 욕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 기억합시다. 그 빛들은 ‘환상의 빛’이라는 것을... 우리가 진정 가지고 있는 것,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이 일상이고 그 너머는 환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을 훔쳐 주었다.
"당신은 일상을 선택했고, 당신 남편은 환상을 택했습니다. 선택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실수도, 악의도 아닌 거예요...”
나는 내 가방을 들었다. 이제 영화를 볼 시간이었다. 고레에타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이 상영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