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그레이스 (Alias Grace)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그레이스 (Alias Grace)'를 보았습니다. Vulture에서는 이 작품이 센세이셔널하거나 음란하지 않으면 - 범죄자 혹은 창녀가 아니면 - 여성의 말에 관심조차 안주는 우리들 모두가 죄인임을 보여준다고 하네요. 센슈얼/섹슈얼한 젊은 여자에 대한 관음증 - 이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네요.

- 제게 있어 '그레이스'는 임신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레이스는 젊고 잘생긴 정신과 의사에게 세명 여성의 인생을 말해주지요. 그리고 그 여성들의 드레스를 찢어 퀼트 이불을 만든다. 메리 위트니의 드레스, 자기 자신의 정신병동 옷, 가정부 낸시 (피살자)의 드레스. 이 세 명의 페르소나가 곧 그레이스입니다. 메리 위트니는 그레이스의 다중 인격 중 하나라고 최면 상태 (혹은 가짜 최면 상태)에서 그레이스는 주장하죠. 그리고 그레이스는 가정부 낸시의 옷을 굳이 벗겨 입고 도망갑니다. 키니어 집안의 마나님 행세했던 그녀를 부러워라도 한 것처럼요.

이 중 두 명은 죽고 그레이스는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무엇이 그레이스를 살아남게 했고 무엇이 나머지 둘을 죽게 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임신입니다. 여자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임신을 했는지 아닌지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 수 있죠. 9개월을 기다리면 되니까요.

메리 위트니는 그레이스에게 계급사회에 반기를 들라고 가르쳐주지만, 주인집 아들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주인집 아들에게 버림받은 메리는 불법 낙태를 받고 하혈끝에 죽습니다. 이 사건은 그레이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죠. 가정부 낸시는 주인인 키니어의 아내가 되고 싶어하지만, 키니어는 결코 그 자리를 낸시에게 주지 않습니다. 키니어는, 내 집에는 하인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있다면서 낸시의 위치를 분명히 하죠. 낸시는 그 집안의 마나님 (lady)가 아니라 첩(whore)이 됩니다. 그레이스를 고용한 이래로 낸시는 '난 너무 뚱뚱해'하고 초조해하다가 입덧으로 헛구역질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약해지면 죽는 거지요.

그에 비해 그레이스는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임신은 하지 않습니다. 영화 끝날 때 그레이스는 메리와 낸시가 원하던 것을 거머쥡니다. 태비라는 고양이, 소, 닭, 개, 말 두 마리. 자기 땅과 집을 가진 농부 남편. 그리고 자기가 손수 만든 퀼트 이불도 있죠. 하지만 살인녀 (murderess)라고 부르든, 창녀라고 부르든, 살아 있는 한 그녀가 승자입니다.

- 이 이야기는 또한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키니어씨, 의사 조단, 맥더못, 제레마이야, 혹은 그레이스의 아름다움을 넘보던 어떤 남자도 그레이스에게 아내로서의 지위를 주겠다고 하질 않습니다. (맥더못은 결혼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또한 창녀라면서 욕하고 같이 죽을 거라며 협박해요) 오로지 꼬마 제이미 만이 그레이스에게 그런 약속을 하죠. 그리고 그레이스는 결국 꼬마 제이미를 선택합니다.

- 의사 사이먼 조단은 그레이스의 이야기에 조금씩 끌려들어가면서 결국 그녀에게 욕망을 품습니다. 저는 그레이스가 최면술 (혹은 가짜 최면술)에 이끌려서 의사 조단의 숨겨진 갈망을 모욕하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봤어요. 나레이션에서 말하다시피 그레이스 역시 분명 젊고 잘생긴 조단에게 욕망을 갖고 있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비로소 자기의 고단한 노동,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해서 들어주는 사람. 조단이 펜을 놀려 그레이스의 말을 받아적을 때마다 천 개의 나비가 내 얼굴에 부드럽게 부딪는 것 같다고 그레이스는 토로합니다. 젊은 남녀 욕망은 그러나 한 걸음 남짓의 빈 공간으로 가로막혀 있죠. 하지만 그레이스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고, 의사는 좋은 가정, 좋은 교육, 높은 지위와 명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욕이라도 해야지 마음이 후련하겠지요. 

- Sarah Gadon이 10대부터 30대까지 연기하며 무시무시한 연기력을 보입니다.
    • 요즘은 넷플릭스를 봐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점점 yes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요 이런 글을 볼 때마다.

      • 치욕의 대지(Mudbound)도 추천이요. 그레이스도 그렇고 과거를 그리는 방식이나 생각이 달라지고 있는 게 보이죠.
        • 정말 봐야만 할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는 신세계라서... 보고 싶은 반면 안 그래도 시간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라 너무 쏙 빠질까 두렵기도 해요.

    • 조던이 왜 하숙집 여주인을 강간한 걸까요?

      전 그게 궁금하더라고요.
      • 꿩 대신 닭이었겠죠. 대사에도 나오구요. 하지만 전 강간이 아닐 거라고 봤어요. 

    • 저는 마지막 결론이 모호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는데요, 뱀과 3개의 과일을 꿰메는게 이야기의 답이 되는가 의문점이 있습니다.




      *그레이스의 나레이션을 믿을 수 있는가? 


      드라마를 관통하는 퀼트 꿰매기처럼, 드라마의 이야기들도 자그마한 조각들로 분절되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밤의 저택에서 키니어가 그레이스를 찾는 장면은 이야기 어디에도 앞 뒤를 맞추어 연결하기 애매합니다. (그 조각이 키니어가 그레이스를 탐하려 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특히 시간의 흐름대로 고백되던 이야기는, 마지막 살인의 날을 고백하기 직전에 하루 뒤로 밀리고 (의사가 변호사를 찾아감으로서) 최면술로 완전히 비틀어져버립니다. (단순하게 앞 뒤를 맞춤으로서 끝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다른 무엇보다, 변호사와 죽은 남자 하인의 말을 생각해 볼 만 합니다. "그레이스는 듣고 싶은 말을 해 준다." 저는 제이미에 이르러서도 그레이스가 제이미가 원하는 말을 해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이미는 자신을 통해 고통받았을 그레이스를 구원했다는 걸로 속죄를 원하면서도, 그레이스가 당했을 그 동안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듣고 싶어하죠. 그레이스는 감옥에서 나가기 전에 거울을 보며 새로운 외견을 조율합니다. 드라마 마지막에 화면 바깥을 쳐다보는 그레이스의 동작은, 시청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교묘하게 짜맞췄음을 시사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의 성적 행위에 대한 무지와 보수성은 이상할만큼 독백 전체를 지배하며, 의사가 물었을 때도 그 인격에서는 나오지 않죠.) 




      저는 이 드라마가 주인공에 대해 신뢰를 끝없이 쌓아가다 일거에 무너뜨리는 행위 자체를 시도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신의 징조와 결과가 맞아들어가는 것들은 역으로 그레이스의 외삽을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에게도 3명의 목 잘린 천사를 이야기에 외삽시키고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 기대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면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 


      먼저는 원작을 읽는게 최우선이겠습니다만, 겨자님의 해석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사가 허구로 이뤄져 있으며, 독자가 원하는 것만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레이스의 소재들을 분해하여 비교하는게 맞는 수순일 것입니다. 나레이션 중, 의사에게 말하지는 않는 차원의 이야기들, 당신은 손도 대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하루 종일 해야하는 살림 등)들에 대해. 또한 반복되는 임신의 위험함이 주요한 이야기라는데 동의하고 이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려움과 책임져야 할 자가 책임지지 않는 어처구니 없음과 끔찍함을 고스라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피해자에 그레이스의 엄마를 추가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위트니의 죽은 모습에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군요.) 




      3중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처음 이야기를 꺼냈듯 뱀과 3개의 퀼트 조각은 뭘 의미하는지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그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범죄 사실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 추측해보자면, 원 인격인 그레이스는 나머지 두 인격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래야 3조각을 숨겨 꿰맬 수 있으니) 서사와 다른 (시청자에게도 은폐된) 제 3의 행위의 결과로 현 상황에 도달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변호사는 그녀가 완전히 유죄라고 믿으면서도 종신역을 이끌어냈으니까요. (그리고 그레이스가 가슴의 상처를 보여주려는 섹슈얼한 행위가 의사에게 가로 막히며 그 진위를 알 수 없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도 일종의 은폐된 사실을 시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이야기를 닫으며 마지막에 굳이 넋이 나가 죽음에 이르르는 의사를 보여줬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레이스를 다 보고도 글을 쓸 깜냥이 안 되었는데 겨자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죽진 않지만 아마 대부분의 기억을 잃고 폐인이 되죠? 전 그 장면이 영화 'Me before You'에서 막판에 남자주인공 죽여버린 설정하고 비슷하게 여겨졌어요. 

      • 의사 업보라고 생각했어요...
    • 저는 최면 때 옛친구랑 짜고 한건지가 궁금했어요. 일부러 모호하게 연출했겠지만- 사람들이 주목하는 아름다운 범죄자란 점에서 금자씨가 생각나고 믿고 싶은 이야기를 믿는다는 점에선 파이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고..첫 씬 독백장면은 미스 슬로운 생각도 나면서 사라가돈 표정에 빠져들었네요. 재밌게 봐서 듀게에 감상글 안올라오나 했는데 감사합니다.
      • Indeed the series reminded me of 금자씨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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