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을 했어요.

지난 주 월요일에 좀 큰 수술을 했어요. 토요일 날 퇴원하고 집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네요.

병원에 있을 때는 약 기운에 계속 잤는데 집에 오니까 병원 침대만큼 편하지가 않아서 그런지 잠을 자는게 힘들어요.

수술 후 3-4주 간은 앉아서 자야하는데 

침대에 배게랑 쿠션을 많이 대어서 경사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삼단계로 나눠져서 경사를 조절할 수 있는 병원 침대만은 못하거든요.

결국에는 소파에 쿠션을 여기 저기 쌓아서 소파 구석에 몸을 고정시켜서 그런대로 자고 있어요. 

소파 구석에 몸이 딱 맞으면 너무 편하고 아늑해서 고양이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아요.

캘리포니아에서 도와주러 여기까지 왔던 언니는 가고 월요일부터는 완전히 혼자 지내고 있어요.

아, 3.5킬로 나가는 눈치 없는 할머니 개랑요.


이번 수술이 6번째 수술인데 아마 한번 더 해야할 것 같아요. 

이런 일이 생긴게 4년 째인데, 그 바로 전에 저는 10년 넘게 쉬지 않고 일을 해왔다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어떻게든 한달을 아무 일도 안하고, 돈 걱정 안하고 쉬고 싶다고 매일 매일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병에 걸린 걸 알았어요. 

그래서 항암 치료 받는 6개월 동안 회사를 때때로 완전히 쉬고, 때로는 반나절씩 일하면서 

와, 나는 운이 정말 좋네. 이렇게 정말 쉬고 싶을 때 쉴 수도 있고...이 기회에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해야겠어! (단편 소설도 쓰고, 대학원 시험 준비도 하고...) 그랬는데 막상 항암을 하면서 마음 편하게 쉬게 되지는 않더라구요. 

그 후에도 수술을 5번하면서 짧게는 이틀, 길게는 한달씩 쉬었는데 역시 제가 항상 바라왔던 이상적인 휴식은 아니었어요.

치료와 수술을 같이 해줬던 남자 친구에게 고마우면서도 가끔은 모든 감정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계속되는 수술에 체력이 많이 떨어지기도 하고...자주 병가를 내야되는게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계속되는 수술에 체력이 더 많이 고갈되고, 밤에 자다가 열에 잠이 깨면 바로 찬 물을 가져다 주던 남자 친구도 없고, 

회사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지금,  

저는 이상적인 휴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침 8:45에는 언니가 아침 10시에 시작하도록 맞춰놨다던 룸바가 청소를 하느라고 돌아다니느라 잠이 깨요.

언니가 냉장고 안에 꽉꽉 채워놓고 간 음식을 꺼내서 아침을 먹고, 강아지 배변 시키고, 밥을 주고...

인터넷에서 신문을 조금 읽다가 피곤해지면 소파 구석에 껴서 잠을 자요. 강아지는 제 발밑에서 자구요. 

일어나서 또 배가 고파지면 수퍼에서 한 입에 먹기 쉽게 잘라놓은 수박이랑, 초밥, 소다, 아이스크림을 배달시켜서 먹고...

잘 먹어서 기분이 좋아지면 또 소파 구석에 끼여서 책을 읽어요.

거의 30년 전 쯤에 읽었던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 갑자기 생각나서 전자책으로 한국어본을 다운받아서 읽기 시작했거든요.

기억했던 것보다 더 좋았어요. 훨씬. 

특히 안느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랑은 각각 독립적인 감각의 경험이나 기억이 아니라는 것. 항상 다정함과 배려가 있어야 하며, 그 사람의 부재를 느끼는 것... 사강은 18살에 이미 이런 걸 알았다는 거잖아요. 저는 40이 넘었는데도 몰랐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아마존에서 같은 책을 골라서 전 남자 친구한테 한권 보내고, 저는 어떤 미소를 읽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오늘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다 읽었습니다. 저는 한번 관심이 생기면 그 사람의 모든 저서를 한 번에 다 읽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사강은 이 쯤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왠지 더 읽으면 실망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어떤 미소의 번역이 너무 이상해서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번역을 내버린거야하는 마음에 프랑스어가 배우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로제타 스톤 불어 버젼에 등록해서 그저께부터 밤마다 한시간씩 온라인으로 듣고 있어요. 어제는 봉쥬의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랩탑에 입을 가까이 대고, 로제타 스톤이 만족할 때까지 25번이나 봉쥬를 되풀이했어요. 


저는 싱글이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고, 항상 결혼을 하고 싶어했지만, 막상 결혼이 가까워지면 그 관계를 벗어나곤 했었어요. 

온갖 구실을 대서 헤어지고, 그 후에는 앞으로 남은 평생을 혼자 지내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오늘 밤도 두렵지 않은 건 아니예요. 

그렇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요. 

살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들이 많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날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 기뻐요...






 

    • 네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날들은 얼마 안돼요 어쩌다 좋으면 많은 날들이 좋은 듯 그렇게 살죠.


      사강이 18살에 알아챈 것들은 영원하고 진실입니다.


      다 비슷하지만 간직하지 못하고 사강도 그랬을거로 생각해요.


      기회있으면 슬픔이여 안녕 봤으면 합니다.

      • 사강은 말년에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싱글인 채로 병으로 죽었다니까 가끔영화님 말이 맞네요. 알았지만 간직하지 못했나봐요.
    • 저는 뭐든지 배우고 싶어하는 편인데 언어쪽은 어쩐지 의욕이 안 생겨요.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하셨다니 프랑스어 노래 몇 곡 ^^ 


      얼른 건강 회복하셔서 아름다운 계절을 만끽하시길... 




      Stacey Kent - La Saison des Pluies 






      Stacey Kent - Que Feras-tu de Ta Vie? 


      • 발음이 너무 어려워서 기가 죽어있었는데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니까 다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어요. 고마워요 언더그라운드님~
    • 안녕하세요. applegreent 님. 잘 지내시나요?

      항암치료 때 쉬는 건 제대로 쉬는 게 아니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몇년 간 수험 공부하다가 취업해서 못쉬다가 그때나마 남도 여행도 떠나고 통영도 가보게 되고 하니까 좋긴 좋더라구요~

      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쑤우 님, 오랜만이에요. 쑤우 님도 항상 건강하시길...  


        그리고 듀게분들 모두 건강하시길... 




        Stacey Kent - So Many Stars 


      • 안녕하세요 쑤우님!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엔 밤에 사진 산책 안하시나요?

        일하시느라 바쁘셔서 그렇겠지만 가끔 사진 산책가시면 사진 좀 올려주세요. 쑤우님도 건강하세요!

        저도 통영은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어요.
    • 어이쿠 불어 전교 꼴등 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존경스럽습니다. 제2외국어는 보통 재미로 접근하던데 저처럼 원수진 사람도 다 있지요 .(로제타스톤으로 접근하면 접속법 같은 건 나중에나 배우게 될까요? )


      점점 더 만족스러운 하루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 답글 달려고 로그인했어요. 홀린 듯 읽었어요. 좋은 글이에요. 쓸쓸한 것 같지만 모든 걸 가감없이 받아들인 사람의 고요한 성실함이랄까... 그런게 느껴져서 저도 고요하게 감동합니다. 

    •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지요. 건강 회복하셔서 휴식을 맘껏 누리실 날이 얼른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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