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불씨

커피콩 볶는 냄새와 같은 얘기 해볼까요.
잠들기 전 이불에 조금 뿌리는 향수 같은 얘기요,
뽀얗게 잘 마른 면 티셔츠에서 나는 햇빛 냄새 같은.

그런 무해무익한 찰나의 기쁨들.

다들 어떤 것들과 어떤 순간을 그렇게 느끼고 계시나요

저 먼저 주절주절해볼게요.

저는 일단 목소리에 굉장히 귀가 곤두서는 인간인데요, 식당에 갔을 때 옆자리에서 굉장한 데시벨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밥이 위로 들어가는지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지는지 경황이 없어질 정도로 목소리에 천착하는 인물이죠. 음성, 어조, 어투, 어휘, 발음, 모두에 민감해요. 흔히들 낭만적이고 설렌다 하는 중저음 목소리나 동굴 바리톤도 저에겐 소화가 어려운 목소리죠. 그런 굵직한 목소리는 너무 기름지거나 너무 흙맛이 나거든요. 이런 까닭에 제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는 마음이 안정되고 미소가 피어나요. 목소리에 서늘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고 종결 어미가 좀 아련하게 바스러지듯 끝나는 그런 말투에다가 어조에 변화가 거의 없으면서 조용하게 얘기하는데 딕션은 정확해서 귀에 부드럽게 꽂히지만 어쩐지 애틋한. 그런 목소리 있거든요. 저는 통화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요, 사실 대부분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통화를 기피하는 거예요. 저렇게 서늘하고 애틋한 목소리라면 그가 3시간 동안 얘기해도 가만히 귀를 기울일 수 있어요. 하지만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에 딱 두 명만 저 목소리를 가졌더라고요....

그리고 전 지하철을 타고 갈 때 그 면세점 상품권 꽂아놓는 아크릴 통 같은 게 있거든요. 가끔 거기다 천 원을 숨겨놔요. 처음엔 “이 천 원을 가져가는 당신, 오늘 하루 행운이 가득하기를” 뭐 이런 포스트잇을 붙일까 했는데요. 참 오글거린다 싶어서 관두고 그냥 천 원만 꽂아놔요. 아무튼 그곳에 천 원을 숨길 때 전 흐뭇합니다. 거창하게 봉사의 기쁨 어쩌고 아니고 그냥 어떤 고등학생이 가져가서 어묵이나 하나 사 먹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과 상상을 하면서 웃어요.

이건 좀 완벽하게 무용해서 도저히 못 쓰겠다 싶긴 한데.....음. 전 일하는 책상 위에 예쁘다 싶은 물병을 놓고. 그러니까 밀크티 병이나 그런 거요. 동그란 거 말고 위스키 병같이 생긴 거 있거든요, 그립감 좋은 걸로요. 그걸 깨끗하게 헹궈서 물을 담아놓고. 종종 흔든 다음에.... 그 병속의 맑은 물과 기포를 구경해요 ;;;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조용히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면 흐뭇해요. 그것들은 위에서 내려오기도 하고 아래에서 올라오기도 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죠.

여러분에겐 어떤 기쁨의 순간이 있나요. 비밀 나눠주세요. 돈도 안 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사사롭고 무해무익한 미소의 불씨들 말예요.
    • 저도 소리 쪽에 그런 '불씨'가 있네요.


      팬케이크를 구울 때 나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반죽을 붓는 순간 '지직'하고는 '뽀오'하면서 반죽이 익으며 올라오는(?) 바로 그 한순간의 소리.


      끊은지 거의 십 년이 되어갑니다만, 예전에는 아주 조용한 곳에서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일 때 나는 치직, 하는 소리도 좋았었네요.


      그러고보니 ASMR을 괜히 즐겨듣는 게 아니군요. 귀청소 하는 소리, 요리하는 소리, 조곤조곤 속닥속닥하는 ASMR들을 주로 들어요.

      • 성냥 치이이익 긋는 소리도 좋아하시죠? 저도 그래요
    • 햇빛냄새라 하니 좋습니다.


      전 은밀한 생님이 좋아하는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 싫어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천원 도로 가져오지는 않죠?


      전 기분 좋아지면 에이그 이 좋은 세상 영원해야 할텐데 하죠.


    • 미소라 그래서 미국과 소련 보다 웃음 미소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 미소 된장국은 왜 빼세요 가영님
    • 내용과 무관하지만 글이 너무 좋네요. 지금이 그 찰나 중 하나일지 모르겠네요
      • 감사합니다.. 덕분에 미소의 한밤을 맞이하네요
    • 동네를 걸어다니다 동물들을 마주치는 순간들이요.

      흐르는 물에서 몸을 씻는 산새들, 재빠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다람쥐, ‘관심 끄고 가던 길 가쇼’같은 눈빛으로 보는 고양이, 멀리서 모둠발로 힘차게 뛰는 (아마도) 고라니 등등...
      • 산새가 몸을 냇물에 씻어요...? 아 그거 가만히 바라보면 흐뭇할 거 같은데요. 다람쥐 출현은 꼭 누가 일부러 장치한 숲 속 이벤트 같아요. (적고보니 왜 앤 셜리 돋죠;;)
    • 속옷바람으로 막 자리에 펴놓은 이불속에 들어갔을때 느껴지는 서늘함, 그속에서 다리를 부비적거릴때 느껴지는 까슬한 촉감. 무려 아기때부터 다리를 요래요래 움직이며 좋아했다고 하는군요.

      • 그거 뭔지 알것도 같은데 제 공감대는 넘 작은 서늘함이라서.. 헛다리일지도모르겠어요. 전 귓볼을 꾹 눌러서 서늘한 감촉을 느끼고 좋아하긴 하는데, 음 이런 기분좋은 서늘한 감촉이 있는 것 같아요. 피부가 찢길 것 같은 얼음의 차가움말고.
    • 출근길에 남의 집 (가옥) 몇 채를 찍어두고 그 집이 가까워지면 혼자 설렙니다.


      마당 있는 단층집, 창문이 낮게 달린 집, 대문이 특이한 집, 제 어린 시절 유행을 따라 짓고 보존이 잘 된 집을 좋아해요.
      • 운치 있어요. 마음에 드는 집이 가까워지면 설레신다니.... 나만의 작은 기쁨을 찾는 게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오늘 살고 내일 살게 해주는 것 같아요.
    • 전 도심에서 길을 가다가 먹을 걸 얻어서 먹고 있는 작은 고양이들을 우연히 볼 때의 기분이 그런 것 같아요. 

      • 순수한 선의가 온전히 전해지는 순간이죠.. 잠시라도 마음이 놓이는 그런 기분.
    • 한겨울 밤 조용하고 약간 어둑하지만 운치있는 골목의 선술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따끈한 어묵탕을 앞에 두고 소주를 따서 첫 잔을 따를 때의 꼴꼴꼴꼴 하는 소리 좋아요 ㅎㅎ 이건 무용한건 아니네요 술을 마시기 위한 절차니까 

      • 좋아하는 사물과 냄새, 소리에 대해 섬세한 포착으로 몰입할 때. 굳이 이벤트가 없어도 평범한 일상이 특별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세부 묘사 있는 설렘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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