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예쁜 시인

지구를 탈탈 털면 제겐 단 한 사람의 조카가 있습니다. 여섯살바기에요.
신세대 답게 그 나이에 여러 종류의 SNS 계정을 가지고 있는데, 좀전에 텍스트 계정에 들어갔더니 글이 세 편이나 올라와 있더군요.
그 중 심쿵했던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 -

# 어느날 보라색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물밖에 없단다.
"물이면 갠차나요." 
자~ 물 받아라.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오늘 보라색이 활짝 피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핀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피었습니다.

아아, 이렇게 예쁜 시(?)라니! 특히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핀 것은 아니었다'는 구절의 놀라운 인식에 깜놀했습니다.
갠차나요, 라고 쓴 것 외에는 맞춤법도 모두 바르고요. 
감격한 '어디로갈까'이모, 그 글에다 이런 답글을 달았습니다. 

# 며칠 전, 강한 바람이 불어 빨래가 떨어지면서 아레카(고무나무)의 줄기 하나를 꺾어놓았어요. 
아레카의 부상이 걱정돼서 깊은 밤 베란다에 나가봤죠.
캄캄한 구석에 놓인 화분 쪽에 가만히 귀기울이고 앉았으려니,
아레카가 끙끙 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어요.

- 아레카, 어떻게 돼가고 있니?
"잘 안돼."
- 왜 안돼?
"어디를 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 모르는구나... 어떡하지?
"어떻게든 해봐야지. 해볼게."

뻗어 올라가던 줄기는 자신이 한 번 끊어졌는데도 다시 잇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텐데라는 걱정이 들었지요.
줄기 하나가 끊어졌다고 생명이 멈추는 건 아니라는 걸 아레카에게 알려줄까 하다가 말았어요.
원래의 줄기와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아레카는 더 이상 자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만남에 대한 기대를 품고서, 
아레카는 지금 어둔 베란다에서 끙끙거리며 하늘로 팔을 뻗고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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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덧: 시인의 프로필. -_-

거주지: 런던
출생배경: 결혼 일년 차이자 유학 육개월 차였던 언니의 몸에 눈치없이 안착하므로써, 그녀를 절망감에 떨며 6박7일 간 울게 했음.
이후. 자신의 성급함을 자숙하며 없는 존재인 듯 순하게 자라줌. 출산과정에도 적극 협력하여 진통 3 시간 만에 안전하게 세상에 도착함.

성장배경: '내 아이에게 소젖을 먹일 수 없다'는 제 엄마의 수유관에 따라 백일 후부터 캐리어에 실려 엄마 아빠와 함께 등교해 대학원 생활을 함. 빈 강의실에서 부모 친구들의 동냥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음. 
부모의 긴박한 스케쥴에 따라 간혹 남의 집 더부살이를 했고, 하고 있음. (밀라노, 파리, 더블린, 서울 등을 떠돈 유랑의 시간들이 족히 일 년은 넘음.) 
낯가림이나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으며, 진정한 21세기형 유목민으로서의 마인드 -자유롭고, 타인을 환대하고, 언제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늘 접속되어 있으며, 박애를 지닌 마인드 -를 가지고 있음.

특기: 독서. (등을 반듯하게 펴고 최소 2 시간은 책에 집중할 줄 아는 애독가.)
그림 그리기.(인디카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한 경험이 있으며 미래주의 화풍을 자랑함.)
축구. (메시와 손흥민의 광팬. 유아 축구팀에서 메시의 백넘버를 사용하고 있으며, 손흥민에게서 받은 사인이 재산목록 1호.) 

취미: 화분에 물주기, 늦잠 자는 부모 머리맡에서 동화책 읽어주기, 설거지하기, 롤러 블레이드 타기, 친구들과 토론하기.
(최근 가장 격렬했던 토론 주제는 '산타클로스는 정말 존재하는가?'였는데, 결론은 '믿고 싶다'로 났다고 함.)

언어습관: 정통 런더너 영어를 구사하며, 제 부모만이 대화 상대인 탓에 나이와 어울리지는 않는 모국어를 구사함.
(지식인들이 쓰는 개념어를 일상어에서 툭툭 구사함. ㅋ)

근황: SNS에 포스트모던한 축구소설(영어)를 연재 중이며, 틈틈이 공개일기(한글)와 시, 동화(한글)를 쓰고 있음. 
왕성한 집필활동 와중에 여자 친구 Rosie를 두고 사각 관계에 빠짐. 연적들에게 동지애를 느끼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음.

현재 최대고민: 친구 셋과 록밴드를 결성했는데 (본인은 베이스 기타와 보컬 담당), 드럼파트를 확보하지 못해 애타는 중임.
혹시 이모가 드럼 비용을 후원해준다면 멤버는 확보할 수 있다는 연기를 슬쩍슬쩍 피우고 있음.




    • 어째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저희집 7세보다 한국어를 잘 하는 거죠. ㅋㅋ 심지어 밴드라니 대단한 어린이네요!!
      • 요즘은 온라인으로 언어든 문화든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이잖아요. 한국 어린이들 유행어까지 다 꿰차고 있어요. 
        다만 우리말 사용할 때, 대부분의 한국민이 당연히 섞어 쓰는 영어조차 사용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부려서 그건 좀 안쓰러워요. 

    • 와... 정말 사랑스럽네요. 이런 말 하면 부담스럽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 너무 기대됩니다!

      • 어젠 삐에로 그림을 그리고 나서, 이유 없이 슬프다며 조금 울더니 잠이 들었다고 해요.
        처음 있는 일이라 언니가 약간 당황스러웠다더군요. 
        엄마로서 아이를 사랑하고 지키고 후원하는 사람이지만, 아이의 가능성에 테두리를 짓는 오염되고 훼손된 환경이기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라고.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건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뿐이라고 - -
               
    • 덧업는 싱겁쟁이 제가 어제 할머니들과 한말입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노선표를 보고있는데 한분이 친절하게 말을 해주네요 두분이 애들 출가해 서운하겠다 그런말들을 해서 듣고있다 그래서요 애를 아예 안나는게 좋아요 했더니 애를 안나면 뭔재미로 라고 했습니다

      • 우리가 다 크고난 후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너희들에게 맞춰주는 감정노동만큼 관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 건 없었다고. 
        그게 자식으로부터 받는 얼마나 엄청난 재미인지 저로서는 모를 세계라...
    • ㅎㅎ 현명한 시인이네요.

      종종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심오한 생각들은 들을때마다 놀라워요.
      • 조카를 통해 느끼는 건데,  아이들에게도 멜랑콜리나 아이러니의 감정, 신화적인 광채가 나는 갈등이 있더군요. 또한 한없이 정제되고 투명한 고민도.
        그 의젓함과 사려 깊음을 대할 때면, 거기서 세계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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