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눈

아침.
세상의 모든 모서리를 허물며 눈이 내렸어요.
눈, 눈, 다정하고 가혹한 눈. 

출근 길, 동쪽 하늘 10시 5분 방향에서 불거져 
잿빛 침묵으로 드넓게 퍼져 나아가던 1초, 2초, 3초의 적막. 
기록해요, 눈에 대한 오랜 반감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어떤 입구를 보았음을.
추락하는 비행체처럼 뜻없이 내리꽂히던 도무지 겨를도 없던 절망적인 아름다움.

오후.
마음의 중심을 둘로 가르며 여전히 눈이 내렸어요.
맑은 날 단골 카페에 가면, 제 커피에는 항상 눈을 조금씩 섞어주죠.
저는 매번 모른다는 표정으로, 커피 속에 번진 눈을 받아 마셔왔어요.
어젠 눈 대신 커피 아래로 흰 구름 하나 흐르고 있더군요.
잿빛 하늘에서 비올라 소리가 나고, 길들이 상하좌우로 울렁이고, 
건물들이 클클대며 수런거리고, 나뭇가지들이 시적인 암호를 주고 받은 건
커피 때문이었어요. 눈이 섞이지 않은 커피는 감각체계를 교란시켜요.

밤.
광속으로 달아나는 희망처럼 눈이 그쳤어요.
길은 꿈결처럼 일렁이고 마른 불빛들은 아름다웠습니다.
낮에 제게 온 기별은 서류, 서류, 서류 뿐이었는데,
눈 쌓인 밤의 거리에서 저는 온 세상의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피곤하고 귀가가 급했기에 눈 덮힌 길의 밤 운전자들은 신경이 날카로웠죠.
저는 혼자서 느긋하게, 갈 테면 가고 말 테면 말 수도 있다는 듯,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으며 운전을 했어요.

언젠가  어떤 여자는 쓰레기 버리고 온다며 문을 나가서 
수십 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죠.
저는 그렇게 집을 나온 것 같기도 했고 
그렇게 나온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했어요.
정신을 놓고 바라보는 도시의 불빛은 유성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그래서 어떤 망각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눈이 내리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떠나온 나라가 있는 것 같아요.

덧: 눈내리는 날이면 찾아 읽는 시가 있습니다. 열아홉살 때 처음 이 시를 읽었는데, 눈이 이처럼 아름답게 이미지화된 시를 지금까지 보지 못했어요.

- 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 / Wallace Stevens

1. 눈 덮힌 스무 개의 산 속에서
  단 하나 움직이는 물체는
  검은새의 눈망울뿐이었다.

2. 세 마리의 검은새가 앉아 있는 나무처럼
  나에겐 세 가지 마음이 있다.

3. 검은새는 가을 바람 속을 선회했다.
  그것은 무언극의 조그만 부분.

4. 남자와 여자는
  하나.
  남자와 여자와 검은새는
  하나.                        

5.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다,
  굴절의 아름다움과
  풍자의 아름다움 중에서,
  검은새의 지저귐과
  그 이후 중에서.

6. 고드름이 거친 유리로
  길다란 창을 채웠다.
  검은새 그림자가
  그 창을 가로질렀다, 오락가락하며.
  마음은
  그 그림자 속에서
  헤아릴 길 없는 이유를 더듬었다.

7. 오, 하담의 가녀린 사내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하여 황금새를 그리고 있는가?
   당신들은 검은새가 어떻게
   여인들의 발치 주위를
   걸어다니는지 보지 못하는가?

 8. 나는 고상한 어조와
   밝고도 불가피한 리듬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알고 있지,
   내 아는 바 속에
   검은새가 들어 있음을.

9. 검은새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것은 많은 원주 가운데 
   한 원주 테두리를 남겼다.

10. 푸른 빛 속에서 날고 있는
   검은새들을 보면
   목청이 좋은 창녀들까지도
   새 같은 목소리로 외칠 것이다.

11. 그는 코네티컷의 길 위를 가고 있었다.
   유리 마차를 타고.
   그때 공포가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가 마차 장구의 그림자를
   검은새로 
   잘못 보았던 것이다.

12. 강물은 흐르고,
   검은새는 날고 있음이 틀림없다.

13. 오후 중 저녁무렵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계속 내릴 예정이었다.
   검은새는 
   삼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 매사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에 자꾸 순위를 매기는 속물적인 근성에 찌들어 사는 요 몇 년 사이 읽은 가장 아름다운 


      글입니다. 감히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이런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 발그레~ (요즘은 쥐구멍 찾기 힘든데......)

    • 

      어제 내린 비

      윤형주 
      작사 : 최인호 
      작곡 : 정성조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
      맑은 이슬 떨어지는데
      비가 내렸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사랑의 비가 내리네
      두 눈을 꼭~ 감아도
      사~랑의 비가 내리네
      귀를 막아도
      쉬지 않고 비가 내리네
      눈물같은 사랑의 비가
      피곤한 내 몸을
      적셔다~오
      조그만 길가 꽃잎이
      우산없이 비를 맞더니
      지난 밤 깊은 꿈속에
      활짝 피었네
      밤 새워 창을 두드린
      간절한 나의 소리여
      사랑의 비~야 적셔다오
      사랑의 비~야 적셔다오

      ....괜히 댓글 달고 싶어서 ^^;

    • 제목 쓰면서 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을 텐데 했는데, 귀동냥 했던 이 노래 제목이 기억에 있었나봐요. ㅎ 개운합니다. 

    • 저는 시보다도 본글이 외려 눈오는 날의 느낌을 더 잘 보여주는거 같아요...
      • 안목에 악수를 건네며...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안목은 창작만큼 뛰어난 재능에 속한다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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