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질>이라는 것

1. 어떤 감정이나 행동을 개념화한 단어는 해당 행위를 명확하게 의식하게 하고 억제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Rechthaberei: 저만의 <개념어 사전>에 실려 있는 단어 중 하나로 자신만이 옳다고 기세등등하게 굴며 상대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걸 의미해요. 우리말에 이런 단어는 없겠지만 '옳음질'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백분 토론> 류의 TV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내가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도저한 확신 및 논전에의 승리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비롯되는 자세죠.

어제 회사에서 서류 하나를 두고, '전달했다'와 '받지 않았다'의 입장이 맞서는 '옳음질'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전달했다'가 제 입장이었어요.
오후 시간을 다 허비한 후 제가 전달했다는 기록이 나왔을 때,  아아악~ 상대의 착오에 대해 화내고 싶은 충동이 끓어오른 건 당연한 감정의 흐름이었죠. 하지만 그순간 갑자기 '옳음질'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제게 훈계하던 그에게 미소를 보이며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는 명제. 이건 인류문화사의 최고의 지혜라고 생각해요. (삐죽)

2. 어린이의 '자기중심주의'라는 게 있죠. 객관적인 눈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어린이 발달단계 상의 특징으로 흔히 '순진함'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어른의 '자기중심주의'도 있어요. 이건 순진성이 아니라 무지, 이기, 탐욕의 소산인데 필히 '옮음질'을 부르기 마련이죠.

이와 연관된 고사성어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있습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본다는 건 굉장한 예술이며 윤리학이에요. 그러나 역지사지하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하면 '남들도 모두 자기 같은 줄 아는' 도그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역지사지'하면서 '주화입마'하지 않으려면 상대에게 많이 물어봐야 해요. 그리고 성심껏 들어야 하죠. 그리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물어보고, 듣고, 그리고 나서 스스로 생각하라. 이건 칸트의 말이군요. -_-)
 
3. 어떤 싸움도 좋은 건 아니지만 필요한 싸움이란 건 있습니다. 비교하자면, 명예로운 싸움보다는 아무 명예도 얻을 게 없고, 대단한 명분도 없는 싸움이 더 힘겹기 마련이에요. 힘겨운만큼 진실한 것이고요.
왜냐하면 그것은 포즈의 여력도 없이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예가 없는 싸움에만 깃드는, 그런 명예란 것이 있어요. (음?)
명예가 없다는 바로 그 점에서 발생하는 명예이니, 이런 명예는 아이러니하죠. 그러나 이런 명예도 한번 길들면 잃고 싶지 않아집니다.

그런가 하면 명예로운 삶에만 깃드는 불명예란 것도 있어요. 최고의 예우를 받으면서도 모욕에 시달리고 있다는 듯한,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을 한 저명인사들을 드물지 않게 대합니다. 그들은 명예로운 삶의 불명예를 의식하고 있기에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명예롭게 살면서 명예 없는 삶의 정수까지 누리기는 어렵다는 걸 그분들이 모르지는 않을 테죠.

불행한 자의 긍정, 변방에서 외로운 이에게 고이는 커다란 사랑, 이해받지 못하는 자의 단단한 충만. 이런 것들이 세상의 공허함과 진부함의 반대편에 있어요. <옮음질> 없이 세상을 받치고 있는 힘입니다.

    • 저도 얼마 전 회사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줬다vs 도로 갖고 갔다" 하다 다행히 십분도 안 되어서 상대방이 서류를 갖고 와서 "아 죄송합니다"로 마무리 되었고, 전 "부장님 이르지 마세욧!"으로 상대적 우위를 얻었다는 기분 좋은(ㅋㅋ) 결론이 났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실갱이가 있을지 생각만으로 눈 앞이 아득하네요ㅜ
    • 저는 보내줬는데 안 받았다고 우겨서 보낸 증거를 프린트해서 보여주니 도리어 화를 더 내더군요. 그것도 상사도 아니고 후배가....

    • 안녕하세요. 올려주시는 글, 깨달음을 주는 글 너무나 잘 읽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듀게에 대략 백만년만에 로그인 했습니다 :^)
    • 1. 이런 것? (아님)


      D4UrI5q.jpg




      ---


      음.. '나만의 개념어 사전'에 등재된 해당 항목의 정의를 보면, 해당 항목이 이미 Rechthaberei의 좋은 용례가 아닐까 싶은데요?




      누구나 '나만의 개념어 사전' 하나쯤 마음에 품고 살텐데, 그냥 계속 마음 속에 품고 사는게 현명하지 않을까라는 기분도 들고.. 뭐 그렇습니다.


    • 사람은 그 즉시 밖에 모르는게 의식적 본능이죠 나중에 후회하고 고생해도 우선 그래야 좀 편하게 살게 되죠.


      그래서 다 틀린놈들이지만 더 틀린놈들이 많죠 영악하게 덜틀린놈들 보단 그래도 순진한건 있습니다.



    • 조선일보는 나치 전범 괴벨스를 확실하게 전범으로 삼아 사람들을 많이 못쓰게 만듭니다.

    • 차이를 인정하면 평화가 온다고 하는데. 그게 참 쉽지않죠. 혐오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 기반은 낡디낡은 배타성에 있는게 아닐까.

    • 이 글을 쓰는 동안 머릿속을 간지럽히던 시구가 있었으니, 프랑스 시인 이브 본느프와의 '참된 이름 Vrai nom' 중 한 구절이었습니다. "나는 인정사정 없는 너의 적이다"




      구글링해보니, 번역된 게 올라와 있네요. 두어 구절 번역이 어색하긴 하지만  함께 읽어보아요~ 




      참된 이름/ 이브 본느프와




      나는 한때 너였던 이 성을 사막이라 부르리라


      이 목소리를 밤이라고 너의 얼굴을 부재라고


      그리고 네가 불모의 땅 속으로 떨어질 때


      너를 데리고 간 번갯불을 허무라고 부르리라




      죽는 일은 네가 좋아하던 나라, 나는 온다


      영원히 너의 어두운 길을 따라,


      나는 너의 욕망, 너의 형태, 너의 기억을 파괴한다


      나는 인정사정 없는 너의 적이다




      나는 널 전쟁이라 부르리라, 그리고 나는 너에 대하여


      전쟁 시의 자유 행동을 행사하리라 그리고 나의 두 손 안에는 


      너의 금간 검은 얼굴을, 그리고


      내 가슴 속엔 천둥 번개 치는 이 나라를 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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