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어제 낮에 브로셔 제작 건으로 라트비아에서 온 사진작가 A를 만났습니다. 대학에 강의를 나갈 때를 제외하곤 한적한 아틀리에에서 종일 침묵하며 작업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태원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는데 분위기가 좀 어수선한 곳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듯했는데, 그의 표정이며 몸짓이 '비어' 보여서 그게 퍽 인상 깊었어요.  환락가의 소란하고 자유분방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적막한 시간과 공간에 길든 몸짓을 계속하고 있었던 겁니다. 뭐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를 향해 고요히 신호를 던지고 받는 사람으로 보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창작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기다리는 자세> 본연의 예민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아티스트로서의 급수를 높여가는 일은 계획이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더군요.  삶의 지반이라고 믿었던 것이 한번씩 꺼질 때마다 눈에 불이 켜지고, 삶이 허물어질 때마다 더욱 깊은 것을 보게 되었노라는 설명이었어요.  그의 인생 역정은 모르지만, 그렇게 말할 만한 과정을 거쳐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봤어요. 지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불행의 체험을 통해 밝아지고 깊어지는 마음이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하고.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 일까요? 
사실 모든 예술 안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고 있는 거죠. 바람이 불고 있어야 하는 게 예술의 도리일 겁니다.

편집기를 열어놓은 채, 너무 추운듯 해 베란다에 내놓았던 화분들을 모두 들여왔어요.
고요한 식물의 생장을 들여다 봅니다. 저 유연한 솟구침 속에도 우두둑거리는 다스림의 시끄러운 고통이 존재할까요?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겠죠.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삶일 것이고요.
    • 기다리는 자세는 제대로 사는데 필요한건데 몸에 익숙하지 않으면 힘들죠.

    • 웬만한 내공으로는 힘든 자세죠. 그와 헤어진 후 휴대폰 메모장에 이 한줄을 적었답니다. '영감이 마음껏 뛰어노는 공간으로서의 인간을 만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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