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우두망찰하게 하는 것

1. 3주 전쯤에 일이 필요하다는 후배에게 번역 일을 연결해줬습니다. A4 용지 40매 분량으로 외교학 쪽 소책자예요. 그런데 어제 보내온 파일을 살펴보니 이것참 엉망이네요. 처음부터 다시 해야될 정도예요. 
제가 미리 원고료를 지불한 일이라 실망이 더 큽니다. 실력은 충분한 사람인 걸 알고 있으므로, 이건 성의의 문제구나 하는 판단에 더 마음이 안 좋아요.  제가 그의 선배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의 무성의를 보여도 좋은 일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관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번역은 제가 다시 하면 됩니다. 도착지에 당도해서야 깜빡 잊고 두고온 물건이 생각나서 급하게 언덕 꼭대기 집까지 뛰어갔다 와야 하는, 그런 숨참 정도의 노고를 쓰면 돼요. 단지 마음이 몹시 헛헛하군요. 관계의 값어치에 대한 생각이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스스로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더.

2. 올해 들어서면서 어째 매일 사고가 터지고, 저는 해결사 노릇으로 분주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가르침 중 하나가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늘 마음을 다잡아야 하느니~ "였는데, 관용과 무심함을 오가며 덕을 닦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_-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다'라는 말이 있던데,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수정되어야 하는 말 아닐까요. 더 많이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와 사.실.은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누가 떠나고 있는 걸까요. 시간의 강물을 따라 추위가 물러가고 있는 이 겨울 끝무렵에, 그림자도 없이.
 

    • 그 후배하고 계속 연을 이어가야하는 관계라면 껄끄럽더라도 일단 후배한테 사정 얘기를 들어봐야되지 않나싶네요. 정말로 성의 문제라면 먼저 부탁한 당사지 입장이니까 더더욱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고요. 

    • 우두망찰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것 같습니다. 낯선 사자성어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기에는.. 내용이 찜찜하네요. 후배분에게 사연이라도 좀 들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때로.. 미리 짐작하고 넘어가면 관계가 금새 붕괴되더라구요. 

    • 이번 글 내용은 조금 우울한 분위기지만 어디로갈까 님 일상글은 늘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먼저 부탁해서 연결해주신 일인데 결과물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준이라니ㅜ 실력 있는 후배라고 믿고 계셨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일이 필요한 후배였는데 성의없이 일하다니...혹시 비용이 서로가 차이가 있었던건아닐까요? 조심스러운 생각입니다만.
    • 후배에게 번역은 내가 다시하기로 했다, 다른 이에게 하청줬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드는 너의 결과물에 대해 설명할 게 있으면 해라, 들어보긴 하겠다는 메모를 보냈습니다. 곧이어 죄송하고 괴롭고 너무 부끄러워서 죽고 싶다는 답문자가 왔어요. '죽고 싶다'에서 제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 사랑과 용서는 사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지요. 마지막 끈을 놓아버린 정도가 되고 나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나한테 타격이 심하더라고요. 용서란 일종의 합리화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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