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독일인의 한국어 수준

1. 어제, 여러 차례 진행된 상대 회사와의 미팅이 끝난 후 dpf가 우리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그들은 정말 덛덛다."
(주: 회사에서의 공용어는 영어고, 제가 독일어를 아니까 그가 심각할 때 쓰는 혼잣말을 수렴하는 정도고, 그가 장난/애교용으로 쓰는 한국어의 수준에 가끔 놀라는 배경.) 
저는 처음에 '덛덛다'를 '떳떳하다'로 알아 듣곤 그의 감정의 맥락이 뭘까 갸우뚱했습니다. 근데 세세히 물어보니, 그가 사용한 건 조선초기의 우리말 '덛덛다'였어요.
덛덛다: adj 늘 그러하다. 변함없이 같다.

제가 우리말에 무심하지 않은 편인데, 난생 처음 접한 우리말이었습니다. 더 기가막혔던 건 제가 놀라서 한 질문에 답한 그의 이 말이었어요.
"한국어는 배울수록 '뜻'과 '청각' 사이의 연결이 체험되는 재미가 있는 언어야. '헛헛하다'는 단어는 그 말을 발음해봤을 때 그 헛헛함의 뜻을  만끽할 수 있었어." 
(꽈당)

2. 늦은 점심 겸  저녁을 같이 먹던 중 테이블 저편에서 뜬금없이 그가 한국어로 중얼거렸습니다.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어. 소시지가 든 빵이어야만 해."

평소에 그가 영어나 독일어로 그 말을 했다면, 삶의 필요조건을 고귀한 것으로 규정짓는 - 결정적인 가치를 제시하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을 거에요. 그러나 그의 우리말 실력에 살큼 놀란 뒤라, "실은 인간은 소시지가 든 빵만으로도 살 수 없지. 마실 것도 있어야 하지."라는 식으로 말장난을 이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뭔가를 배우는 사람에겐 배움의 입각점이란 것이 있는 거죠. dpf가 한국어에 입각하고 - 자리를 잡고 머물러- 있게 된 포인트가 뭘까 그게 궁금했어요.

3.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해봤어요. 
- 한국 시인/ 시 중에 좋아하는 게 있어?
"윤동주. 친구가 그의 시집을 선물했는데 <달같이>를 읽고 반했어.
- 호~ 그 시가 이해됐어?
"달이 수레바퀴처럼 돌면서 자라는 게 상상됐으니까 이해한 거지?"
- 하!

4. 달같이/ 윤동주 

年輪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하나 뻐근히
年輪처럼 피어 나간다.

5. 年輪: 
굴러가면서 자라고, 굴러가면서 피어나기도 하는 이 마술적인 수레바퀴의 의미를 그가 이해하다니. (꽈당)

    • 훔볼트의 후예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멋진 동료시네요! 

      • 물리학을 전공했으니 훔볼트 형제  양쪽의 재능을 다 물려받은 거겠죠. - -

    • 엄청난 지적 능력을 지닌 분이시네요. 같이 이야기하면 배울 게 많을 것 같아요.


      헛헛하다는 발음해 봤습니다. 진짜 헛헛하네요.ㅋㅋ




      제 독일 출신 동료는 제가 독일어 좀 알아 듣는다고 회사에서 가끔 독일어 말을 해주는데 저는 구글 번역기를 돌려야 한다는...

      • 그가 집어낸 '답답하다'도 한번 발음해보세요. 정말 답답하더군요. ㅋ


        제가 웬만해선 남의 지력에 감탄 안하는데, 정말 명석한 사람이에요. 그건 배우거나 흉내낼 수 없는 부분이라 가끔 감탄만 합니다.

    • 소리에서 느낌이 풍기는 언어로 치면 독일어나 (독일사람들이 사투리라고 우기는 ) 네덜란드어도 만만치않치않습니까 ?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채로 독일에 도착해서 라디오방송중에 귀에 처음 남은 단어가 totegeschlagen였는데, 거참 듣기도 험악한 단어로구만. 안찾아봐도 심상치않음을 알겠군.. 이런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독일어는 그러고보니 1984의 언어성의 원칙을 잘 따르는 언어같기도해요 :) 뭔가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보다는 한정없이 붙여서 누가 숨넘어가나 내기하는듯.

      • 낯선 언어를 듣고 뜻을 유추하셨으면 언어감각을 타고나신 거죠. ㅎ


        독일은 라디오 방송극의 전통이 강한 나라로, 바흐만이 방송극 작가이고 벤야민도 어린이용 방송극을 썼을 정도로 라디오가 문화/교양의 수단으로 활용돼요. 어릴 땐 그걸 들으면서 참 아득하고도 가관인 언어구나 싶어 폭폭 한숨을 쉬곤 했죠.



        아니러니하게도 독일어에 대해 친밀감을 갖게된 건, 집에 있던 이미륵의 'Der Yalu Fließt 압록강은 흐른다'를 펼치면서였습니다. 그의 간결한 문체에서부터 독일어를 겁내지 않게 됐어요. 



    • 헛헛하다는 저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단어라 괜히 반갑네요. 물론 전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이지만(...) 되게 지적인 분이실 듯. ㅋㅋ
      • 발음될 때 백미인 우리말이 적지 않죠. 한국인이라고 의미와 청각이 연결되는 체험을 다 하는 건 아닐 테고요.
        그가 "답답하다 라는 말을 배우면서 한국어를 모르던 시절의 답답함은 벗어버렸지." 라며 싱긋  웃었을 땐 삐죽~했답니다. '잘났다, 잘났어!'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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