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출장이 잡혀서...

......다음 주에 난생 처음 아프리카에 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놓고 몇 장 뒤적이기만 했던 엘리아스 카네티의 <모로코 기행>을 읽고 있는 중이에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의식 침잠 용 독서인 셈이죠. 그런데 며칠 째 잡고 있는데도 평소 독서습관에 비해 속도가 영 붙지 않네요. 왜일까요?

책은 마음에 듭니다. 내용 뒤에 카네티라는 개인이 서 있는 게 느껴지는 글이에요. 선명하고, 단정하고, 안정된 자의식이 있습니다. 문장도 좋아요. 세련된 비약이 있으며 압축과 생략이 잦은데도 글이 리드미컬해요. 다만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 - 유럽의 세계사관 - 이 제겐 상당히 거슬립니다. 

(샛글: 서양주의 세계관을 또렷하게 비판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우리나라에서 무시되었던 건 저로서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의 <오리엔탈리즘>이 한국에 소개된 게 제국주의 비판과 제 3세계, 민족 의식 등이 가열찼던  8,90년대였는데 왜 그랬던 걸까요?  역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팔레스타인이라서 한국 운동권에서 주목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던데 설마 그래서였을까요?) 

이 책 문장에는 "It looks like .... "라는 표현이 너무 자주 등장합니다. 물론 기행문에서 그런 방식 외의 다른 기술형식을 찾기 어렵긴 해요. 'It looks like ...., 그러나 I actually don't know...' 라는 게 기행문의 흔한 기본 양식이긴 하죠.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땅의 삶에 대해서도 모르기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I actually don't know), 적어도 자기 나라/고향을 한없이 낯설게만 바라보지는 않는 거니까요.
이방인의 시선은 대담하고 무례하기 마련입니다. 아니, 그런 시선은 어떻게 감춘다 하더라도 마음까지 억누르기는 어려운 법이에요. 따라서 감정과 눈요기거리를 사냥하는 건 여행자의 기본 악덕인 것 같아요.

기행문은 그 공간에 대해 무지해서도 안 되고 통달해서도 안 되는 거겠죠.  무지를 내세운 앎이 기행문의 형식으론 적당할 것 같긴 해요. 
우리는 무지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는 극적인 사실을 체험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무지해서 발견한 진실을 진실로 확신하기 위해서는 이미 무지에서 벗어난 앎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책을 읽노라니 여행자가 지어 보이는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기행문은 모로코의 표정인 동시에 카네티의 지루한 노회의 표정이니까요. 어쩌면 카네티는 기행문을 쓰기 전에 모로코에서 이미 권태롭고 공허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엔 너무나 많은 감상과 이미지들이 공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각자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지가 가장 유용한 지혜인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려나... '본다'는 건 '보인다' 이후에 오는 과정인 거죠. 인간은 '보이는 것' 중에서 다시 한 번 '보기'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본다'는 것을 1차적으로 선택할 수 없어요. 1차 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가능한 건 '보지 않는다' 쪽이죠. 보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는 건 '봤다'는 착각의 미몽에서 깨어나, 마침내 한 번쯤은 '보기'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닐런지.

문득 드는 생각. 
인간은 '각인'의 형식으로만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것. 더 나아가 말하자면, 삶의 실체는 각인의 한 부분일 뿐일 수 있겠다는 것.
(글쎄, 과연 그럴까요? 적어도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요. - -;) 




    • 원서로 읽으니까 진도가 느리죠
      • 제 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실은 어제 방탄소년단 새 앨범이 나와서 해외 아미들 리액션 영상 기웃거리느라 그런 것 같기도.ㅋㅎ

    • 에드워드 사이드가 우리나라에서 무시되었었나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도 수업 시간에 이 분 저서에 대한 얘기를 여러 번 했었고 관련 서적들도 꽤 들어왔던 걸로 아는데요.
      •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박홍규 교수의 분노를 접했거든요. 세계적으로 뜬 그 좋은 책이 번역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하지 않아서 자신이 나섰는데, 한국은 세계 유행에 민감해서 모든 책이 가장 빨리 번역되는 나라임에도 출판사들이 그 책을 다 외면했다고... 사이드는 20세기의 중요한 사상가이자 영문학자인데 지금도 읽히지 않고 학계에서 언급도 안 되는 실정이라더군요. 
        실은 부모님댁 서재가 한시절 한국의 온갖 금서였던 책들까지 다 보관돼 있는 박물관인데, 에드워드 사이드는 없었어요. 제가 구입해 넣었답니다. - -
        • 그랬었군요.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하네요. 한국은 한 때 반미, 반제국주의 서적이 꽤나 융성했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네요.
    • 부럽습니다..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모로코인데.. 그런데 여행하기에 아직 조금 위험하다지요?

      • 카사블랑카가 로망의 도시였는데 드디어 가보게 됐어요. IS 동조 테러조직이 가끔 적발되든 말든 저는 안전국가로 알고 있는데 혹시 제가 무슨 불상사를 당하면 위험국가인 걸로...-_-;
         
    • 모로코 하면 짐 자무시 감독 [only lover left alive ]가 젤 먼저 생각나요.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 짐 자무쉬가 영리하다는 느낌을 줬던 영화예요. - -  캐스팅도 탁월했고 문화와 역사를 조망하는데 벰파이어를 사용한 게 신의 한 수였죠 디트로이트를 문화적 재생의 공간으로 선택한 것도 스마트했고요.  

    • 저도 나이들수록 백인 남성이 쓴 책이 읽기 어려워지더라고요. 탁월한 식견에 풍부한 지식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저자도 나름은 지식인이고, 나름은 깨어 있고, 나름은 공정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덕지덕지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을 못 넘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로코 부럽습니다. 저로선 평생 가볼 일이나 있을까 싶게 멀리 들리는 지명이네요. 잘 다녀오세요! 

      • 그렇죠? 여러 문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접하노라니 서양에 의해 동양이 조명되고 의미가 재조정되는 관점이 새록새록 불쾌해요. 서양에 의한 아시아의 왜곡이 이뤄지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우리 안에 내면화되는 게 싫고 걱정됩니다.
        그나저나  모로코 애호가들이 많으시네요. 제가 세세히 경험하고 와서 모로코 여행단을 함 만들어볼까 충동이 불쑥~ ㅎ

    • 에드워드 사이드가 인기가 없었던 이유? 80년대 말 90년대 초 대학교정 분위기는 사이드가 발을 붙일 상황이 아니였죠. 대학건물 옥상에서 돌을 던지면 돌에 맞는 사람은 둘 중 하나라고 했죠. 운동권 아니면 고시생. 사이드는 제3세계의 관점에서 미국진영과 소련진영을 모두 비판한 사람이죠. 당시 우리 대학가는 미국진영아니면 소련진영이었죠. 양 진영이 거의 사생결단으로 싸우는데 사이드같은 절충의 잡탕같은건 양진영 모두에게 너무나 약해빠져보였겠죠. 소련이 해체되고 미국이 승리하면서 소련진영 잔당 일부가 이데올로기의 포로답게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식민주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기웃거리다가 사이드가 뒤늦게 소환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사이드의 눈엔 양진영 모두 다 제국주의자들로 보였을 겁니다.
      • 현장에 나가 있는 singlefacer 기자 나와주세요~ 에 응답한 증언 같습니다.ㅎ  사이드가 외면된 배경이 보이네요. 고맙습니다.
        시대적 맥락으로는 제국주의의 뿌리를 드러낸 그가 반가웠을 것 같은데 흥칫뿡~ 했다는 게 여전히 의아하긴 해요. 독재와 싸우면서도 아직 민주주의 가치관이 정립되지는 않았던 걸까요.
        문득 사이드가 인용했던 빅토르 위고의 말이 떠올라서 타이핑해봅니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부드러운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전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하다."

        • 당시 반독재 진영에서 이념적 틀을 제공하던 사람들이 경전처럼 보던것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이었죠. 제국주의론은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는 약소민족들이 미국 영국 일본 등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두주먹 불끈쥐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에 이 경전을 버리고 개종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에요. 나름 독재,제국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으니 반제,반파쇼일거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겠지만 사실 자기도 독재와 제국주의의 아종이라고 그 누가 알았겠어요. 그런 생각을 내보이는 순간 파쇼제국주의 분자로 몰려 버리니 이건 좀 아닌데 하면서도 선뜻 나서기 어려웠겠죠. 그러니 사이드의 세계시민주의도 당시의 열혈애국청년들에겐 도저히 어필할 수가 없었던거죠.
          • 안개가 더 많이 걷혔어요. 글에서 그 시절을 관통해온 이들만이 갖는 포스가 확 느껴집니다. - - '고난을 겪음으로써 지혜에 이른다’는 뜻으로 쓰이는 'pathei mathos 겪음과 배움' 이라는 희랍 격언이 생각나요. 
            아무튼 극단의 시대를 겪어내며 이 정도의 세상이라도 만든 분들, 리스펙트! 

            • 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조금 일찍 태어나고 조금 뒤에 태어난 그 차이밖에 없어요. 일 잘보고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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