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는 무엇인가?

유튜브에 랜덤으로 뜬 6.25 관련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저는 13살 때까지 현충일과 6.25를 같은 날로 착각했어요. 이후 구분하게  된 후에도 해마다 이 날이면 그 아픈 영상들을 보게 되곤 합니다. 마음이 슬프고 불안정해지므로 꺼야지, 돌려야지 하면서도 꾸역꾸역 끝까지 보고 말아요. 마치 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라며 따라붙는 사람에게 '네, 관심 있어요'라고 답하는 것 같은 잘못된 선택/고집이죠.
온갖 감정에 휘둘리며 다 보고 나니 역시 쓸쓸함만 남습니다. 워낙 익숙한 영상이라,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에서도 참 쓸쓸하구나 선에서 감정의 타협을 보게 됐습니다. 

다만 어떤 내용이 계속 질문을 던져와요. 이를테면 이런 영상입니다. 
동지섣달, 피난열차에 몸을 싣지 못한 사람들은 언 강을 걸어서 남하해야 합니다. 피난민 중에는 기르던 소를 몰며 걷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소는 사람보다 미끄러운 빙판을 걷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집니다. 주인이 소를 부축해요. 소가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그 밑에 짚가마니를 깔아주는데, 뒷발 밑에서 짚가마니를 꺼내 얼른 앞발에다 깔아주는 식입니다. 반복, 반복, 반복.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죠. '아,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 한숨은 일상과 생활의 형태에 대한 의문입니다. 물론 제가 택하는 대답도 '해야 한다'예요. 그런 긍정 후에야, 걷는 소의 발밑에 짚가마니 깔아주기라는 자세가 실현되는 것이니까요.
피상적으로 보면  그 행위는 어이없는 노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폭격을 피해 피난은 가야 하고 소도 강을 건너야만 해요. 소를 '데리고' 가는 것이죠.  소는 나중에 생계를 위해 팔 수도 있겠죠. 잡아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 터전에서 밭을 갈게 할 수도 있고, 지친 아이를 태울 수도 있을 테죠. 무엇보다 식구인 소, 정들고 고마운 소를 폭탄 떨어지는 도시에 버려두고 오는 일  그 자체가 그들에겐 선택할 수 없는 야만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소와 함께 간다>는 것. 그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소와 함께>... <소>와...

자, 그리하여 이런 화두가 머릿속 전광판에서 명멸하게 돼요. '나의 <소>는 무엇인가? 내가 끝까지 데려가려는 <소>는 무엇인가?'
다큐 영상에서의 <소>는 생존을 위한 절대수단으로서의 존재였습니다. 그런 의미가 기본에서는 바뀌지 않겠지만, 지금 저는 전쟁의 와중에 있는 게 아니므로 이런 질문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살아남기 위해서, 삶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내가 곁에 두고 굳게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만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여 혼돈을  미소로 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소>.  현재의 내게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빙판길 같은 일상에서 짚가마니를 까느라 손발이 조금씩 얼어붙더라도, 함께 가야할 <나의 소>가 곁에 있다면, 그렇다면 적잖이 든든하겠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현재와 미래를 두렵지 않은 자세와 표정으로 견딜 수 있을 듯해요. 뭐 인생이 견디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긴 합니다만. 

덧: 기분에 흠집난 김에 저녁엔 <허트 로커>나 찾아볼까 하는 충동이. -_-
 제임스의 대사: (아이에게) "너도 나이 들면 지금 좋아하는 것들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을 거야...... 니가 지금 좋아하는 것들이 그런 식으로 다가와. 그리고 내 나이쯤 되면 의미있는 건 한두 가지로 줄어들지. 내 경우엔 지금... 하나 뿐이야."


    •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되는 글이네요. 제게 <소>는…제 가족들이군요.
      • 가족은 이미 하염없이 우리 내면에 있는 존재니까 제외해야죠. 같이 <소>를 생각해 보아요~ 
        • 지금 친구 둘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얘네들한테 네가 나의 <소>…했다간 어떤 표정들을 지을지…;;
    • 소도 뒤쳐지고 싶지 않았겠죠.. 전쟁은 동물이고 사람이고 슬픔과 고통뿐이네요..
      • 누군가 말했죠. "모든 인류 죄의 총합은 전쟁이다."
    • 그대는 소명이 없는데 -없지요?- 그런 <소>가 있겠어요?

      • 소명 없는 사람이라고 설마 <소>까지 없겠습니까? 찾아보려는 태도는 필요해요. "구하라 얻을 것이니~"
        끝내 못 찾으면 실성이라도 하게 되겠죠. 그러면 저는 세상이 모르는 시인이 되는 거고. - -
    • 데리고 가야하니까 외는 별 생각이 안나는군요.


      몇년전 아니 더 오래전 6.25일이 공휴일 빨간색으로 된 달력이 있었는데.


      공휴일로 아는 사람이 만든건데 아마 그런 사람 많을걸요.

      • 또래에 비해 얼뜨기이기도 했지만, 유년기를 한국 밖에서 보낸 영향도 없지 않을 듯.
    • 아마 전쟁이 발발하면 저라면 징집이 될거고 징집되면 처자식 모두 놔두고 사선으로 가겠죠. 그렇게되면 단언컨대 길가에 널널하게 피어있는 풀 한포기 마저 새롭고 아름답고 소중하게 보일 겁니다. 무슨 노래가사같아 진부하게 들릴지모르겠으나 이게 인간의 운명인거죠.
      • 생사의 기로에서도 발견되는 소소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라니!
        저는 전쟁 같은 극한 상황에선 의식의 시동이 꺼져 한마리 벌레로나 숨쉴 듯합니다.


    • 625 영상을 보면서도 삶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길어올리는 깊은 시선이 저에게도 잠깐 닿는 듯 합니다. 


      저에게도 소가 있을까요.

      • 사진 용어 중에 '근접감각'이란 게 있죠. 무엇이 다가오면 결정적 순간에 몸을 털어 초점을 흐트러 놓는 것.
        웬지 그 감각을 익히면 비로소 나의 <소>가 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 일희님도 그 감각을 훈련하시면 <소>가... ㅎ

    • 소의 발 앞에 짚가마니를 깔아주고 또 깔아주고 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눈물이 날 것 같네요..
      • 그 노고는 주인의 아득한 심연이 느껴졌기에 슬프기보다 괴로웠어요.  짚가마니 깔아주기는 여전히 현재 우리 일상의 기본구조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 다음에는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였으면 좋겠네요.
      • 아, 저는 안 해본 생각/감정이 제시하는 반전.  장자의 '나비꿈'에 깃든 뉘앙스가 소환됩니다. <소>도 나의 상대적 가치에 불과하고 '나'도 <소>도 고정된 가치가 될 수는 없지 않겠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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