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 여행 좋아하세요?

(지난 모로코 출장의 파트너 동료가, 알게 모르게 찍은 사진을 카톡에다 듬뿍 올려 놓은 걸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특히 기차 이동 시의 사진들을 보노라니 정서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서... ) 

기차 여행을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해요. 유럽의 철도체계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로코의 시스템도 세밀했습니다. (예약이 안 되고 좌석 지정이 안 돼서 편리함과는 거리가 있음.)
기차가 발의 확장물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죠.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저는 밤기차 여행만은 망설이게 됐어요. 그건 기관사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왜냐하면 낮의 기차에서는 풍경을 통해 기차가 달리는 방향을 언제든 확인할 수 있지만, 밤기차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승객이 잠들어 있는 객실, 창 밖을 주의깊게 살펴봤자 보이는 건 제 얼굴 뿐이거든요. 
   
특히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Inter city 객실에선 더 그래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건 단일한 어둠과 그 위에 떠 있는 제 얼굴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좀 무서운 느낌이 들더군요. 몇 시간씩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는 건, 나르키소스적 허영이 있는 사람에게도 버거운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가장 불안한 건, 기차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중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죠.
'나는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는 걸까? 혹시 이 기차는 궤도를 이탈하여 시베리아 벌판이나 몽골의 대평원을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창 밖 저편에서 다른 기차 한 대가 나란히 달리는 경우도 있기는 해요.  방향도 같고, 속도도 비슷해서 창 너머에서 영원히 평행을 이루며 달려줄 것만 같죠. 하지만 역시 밤기차에서 확연히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얼굴 뿐이에요. 그 굳은 얼굴을 곁에 둔 채 한참을 가다보면, 두려운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죠.
'창에 비치는 저 얼굴이 이렇게 영원히 나를 따라다니면 어떡하지? 기차에서 내린 후에도 끝끝내 저 얼굴이 곁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플랫폼에도, 택시 안에도, 호텔에까지도 따라오면 그때는 어떡하지? 生이 끝날 때까지 머리가 둘 달린 괴물처럼 그 모양이라면.....?'

언젠가 몹시 지친 상태에서 동유럽 업무를 볼 때였어요. 어느 날 밤기차의 식당 칸에서 맥주를 계속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싹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잠시 후 날이 밝기 전에 이 기차는 어느 역엔가 도착하겠지. 난 그 낯선 역의 이름을 모르는데, 기차에서 내린 뒤 역에 써 있는 글자들을 하나도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몰라.'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제 불안처럼 그 역의 모든 것이 기차 창 유리에 비친 제 얼굴처럼 거꾸로 되어 있을런지! 

친절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야 하겠죠. 하지만 잊은 물건 없이 돌아가시라거나, 편안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멘트 외에 도움이 되는 설명은 없는 법이죠. 승객들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순순히 기차에서 내리고, 곧 기차는 떠나버려요. 그런데 그 역의 글자들은 창유리 저편 세계처럼 전부 거꾸로 되어 있으므로 저는 아무것도 해독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식당의 메뉴판이며 길 안내판도 읽어낼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중에 만나는 친구의 얼굴도 창에 비친 듯 거꾸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말할 것도 없이 기차로 여행하는 것은 편안하고 단순한 일이에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미 썼듯이, 창 이편의 세계와 저편의 세계라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거예요.  밤기차의 유리창 표면이 두 세계를 은밀히 가르고 있어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기관사가 거울 저편의 세계를 달리는 기차와 제가 탄 기차를 바꾸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떠나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도, 실은 내가 아니라  밤기차의 창 저편 세계에서 온 다른 '나'라면요?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저는 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나  밤기차를 탈 때면 언제나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기차는 가능한 한 피하려고 노력하지요.

 
    • 기차를 일단 탄 상태에서는 어떤 교통기관보다 제일 안심되고, 그거 말고는 시간만 되면 가차없이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좀 있습니다. 쓰신 글은 은하철도 999의 또 다른 에피소드 같은 느낌이네요. 메텔없이는 불안하죠

      • 안전에 대한 믿음, 편안한 설렘을 갖게 하는 것, 가차없는 정확성이 기차의 매력이죠. 
        평생 기관사로 일하셨던 분의 글이 생각납니다. "철도/기차는 인류의 노스탤지어다. 통일이 되어 서울역에서 런던행/파리행 열차표를 끊는 공상을 근무기간 내내 했으나 결국 그 흐뭇함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메텔을 태우고 우주를 달리는 <은하철도999>가 어언 42년 째를 맞는군요.  

    • 8시간 달리는 야간운행기차 세번 탔었는데 시꺼먼 창밖으론 보이는게 없어서 심심하기도 하고 뭔가 편치 않음에도 밤새 코골며 흠뻑 숙면?하시는 분들 덕에 매번 조금도 못자봤네요. 야간 기차는 풍부한 감수성은 접어두고 어디서나 숙면이 가능한 분들에게나 좋은 듯 해요.

      그나저나 모로코 철도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니 의외입니다.
      • 특히 북부 대도시를 연결하는 ONCF(국영철도청)시스템이 편리하더군요. 아직은 카사블랑카 - 탕헤르 구간만 운영하지만 TGV도 개통됐어요. 
    • 좋아해요 이게 어느쪽으로 가는거야 그랬고 오래 나만 보이는 창도 기억에 좋아요.

      • 문득 가.영님 꼬꼬마 시절을 상상해봤어요. 얼마나 귀여운 어린이였을까... ㅎ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가끔 백색소음으로 기차 소리를 틀어놓고 자긴 하지만, 나이 한 살 먹어갈 수록 편한 자리만 찾아지니 큰일입니다. 이젠 밤에는 잘 자고 싶고 상상력도 날이 갈수록 궁핍해진다, 글을 읽다 보니 반성이 되네요.   

      • <설국>은 주어 없는 첫문장의 매혹이 작품의 반을 감당하고 있는 듯. - -
        저도 20대를 지나고 나니 느낀 걸 추적해보려는 마음이 점점 쪼그라들어요.
        그나마 듀게를 공책 삼아 괴발개발 써보는 게 감각을 동일한 진동의 언어로 바꿔보는 계기가 된달까요. ( 먼산)
    • 몽상가...어떻게 새벽에 이런 몽상이 가능한가요? ㅎㅎ


      저편 세계에서 온 '나'와 나를 어떻게 구분하지요?


      • 몽상과 방랑이 가장 지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새벽시간에 하기 딱 좋아요~ 


        랭보, 보들레르, 벤야민, 짐멜 정도는 돼야 몽상가라고 할 수 있죠. 저야 뭐... 

    • 지난달 뮤지컬 보러 간만에 기차 타고 여기저기 다녔는데, 정말 좋더군요. 그동안 주로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앞으로는 기차를 좀 더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 1분 짜리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The 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 Station>을 가끔 찾아봅니다. 
        첫 몇초는 기차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물체인지 느끼게 해주는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꼽아요. (과장?)
        https://www.youtube.com/watch?v=RjtXXypzt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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