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과 다르게 불행한 이들의 욕망은 단순한 것 같습니다. 원시적으로 단순하게 정화된 욕망만이 삶의 고단함을 초토화시키는 에너지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의 눈엔 그게 포기나 추락으로 보이겠지만, 그들은 단지 의식을 놓아버리는 일종의 공백상태를 지향하는 것 뿐입니다.

윗층에 사는 아주머니는 알콜 중독이 의심되는 분이에요. 어머니와 비슷한 연령대인데 중년 여성의 평균치보다 몸이 좀더 비만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제 눈엔 살이 찐 부유한 여성은 게으르고 권태로워 보이고, 비만한 서민층 여성은 피로하고 슬퍼 보여요. 후자는 나날의 햇빛이 부어져 잎만 함부로 무성해진 메마른 땅의 식물 같습니다. 자신을 사로잡은 운명에 대한 역겨움에 대항하지 않는 것. 척박한 땅의 식물에게 그것만큼 강력한 존재 거부의 방식이 있을까요?

천장을 통해 그집 가족이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는 생각하죠. 살아 있구나, 또 술과 눈물로 아주머니의 눈이 퉁퉁 부어 있겠구나. 도대체 왜? 언제까지? 
그분과 저는 스칠 때마다 서로 상냥하게 안부를 묻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의 그녀는 제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취해 있어요. 마비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앞 벽에 기대어 가까스로 서 있거나 집 앞 층계참에 앉아 있기도 합니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면 어떡해요?'라고 말해본 적은 없어요. 그분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제가 알고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은 '슬퍼 보이세요.'라는 말을 건네본 적이 있어요. 그의 대답은 '응', 그저 그뿐이었습니다. 

어젯밤 퇴근해서 들어오는데, 여전히 그분은 허망에 시달리는 표정을 하고 엘리베이터 앞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술냄새도 안 나고 그 얼굴에서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날이 더워요." 짐짓 밝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녀는 '날씨 같은거 나는 신경 안 쓴다'는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실이란 견디기 어려운거야."라고 뜻모를 혼잣말을 웅얼거렸어요. 이제 막 제가 겪고 온 세상의 치열함과 아름다움을 하찮게 여겨지게 만드는 한마디였습니다. 그 말은 어쩐지 生에 대한 저의 방심을 각성시키는 듯했습니다. 

'진실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죠. 진부하고 둔한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고 심오하고 예민한 이들도 그랬습니다. 진실이 고통스러운 것인지 고통이 진실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지만, 둘의 관련성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 
고통이나 진실은 모두 자신에 대한 직접성을 갖도록 해주는 감각입니다. 그러나 그 직접성은 순간적이고 아련한 환기일 뿐이고, 그러므로 자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신이나 행복, 불행처럼, 그런 체험의 핵으로부터 인간은 늘 어느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삶은 언제나 삶의 쓸쓸한 근처일 것이라고. 
                                                                                                          
덧: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아주머니 모습들을 다 지워야지, 마음 먹습니다. 도움도 주지 못하고 변화도 끌어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품고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일상에서의 수행능력 자신감을 약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지우겠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거짓말이죠. 이곳에 사는 한 그건 불가능한 채 일렁일렁 기억될 겁니다. 사실적으로 깜빡깜빡하는 촛불처럼.

"불을 쬐듯이 불행을 쬘 것, 다만 너 자신의 살갗으로!" - 이성복
    • 맞습니다. 심히 공감해요. 우리는 불행을 체험하면서 그 강렬함과 삶에 밀접해지는 감각에 그것이 진실인것처럼 자학적인 향수를 느끼곤 하지만 오히려 일상은 조금 떨어져있는 거라 생각해요. 심장이 터질 듯한 감각은 생을 실감하게 하지만 우리가 늘 시속 십오킬로미터로 뛸 수는 없으니까요.


      글의 말미에서 함부로 동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참으로 예의바르다 느낍니다!
      • 삶에서 도피처는 기본적으로 필요한데, 그늘 하나 없이 땡볕에 서 있는 것 같은 불행한 사람들을 더러 만나게 됩니다. 
        '참회자의 얼음'이라는 시적 표현이 있어요. 고산지대의 얼음들이 햇빛을 받아 녹으면서도, 동시에 얼어붙는 과정이 반복되어 점점 자라나는 기괴한 형상물을 말해요.
        지리학 용어로도 사용된다는 그 뾰족한 얼음기둥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고드름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은 군집물이더군요. 불행을 겪는 마음들이 바로 '참회자의 얼음' 같은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 가지는 멋대로 잎만 무성한 나무도 불행과 멋을 같이 가지기도 하니 그 아주머니도 좋아지리라

      • 불행은 공기와도 같은 거라며, 불행에 대한 통찰을 잘 그려 보인 작가가 체홉이죠.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부분에 조카 소냐가 아저씨에 건네는 이 말을 아주머니께 응원으로 전해볼까요.
        "평생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오셨죠. 하지만 기다리세요.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에요. 쉴 수 있어요."

        그러나 실은 그의 단편 <적>에 나오는 이 결정적 명제에 더 공감하죠.
        "불행은 사람을 화해시키지 않고 떼어놓으며, 사람들이 동일한 슬픔으로 결속되어야 할 순간에도 행복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불공평함과 잔인함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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