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위대한 발명

BBC에서 제작한 '인류의 발명'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봤습니다. 
세계 석학들이 꼽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인쇄기계더군요. 이것이 발명된 후, 지식의 축적을 통해 자연을 지배할 힘을 얻게되었다는 게 이유입니다. 동시에 그로부터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강간'이 시작되었으며, 지구 파괴의 속도가 앞당겨졌다는 비판도 곁들여졌고요.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인 컴퓨터도 인쇄기계 비슷하게 많은 표를 얻었어요. 스스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컴퓨터는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를 바꿔 사이버 요소를 생리과정 안에 도입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은 사이버네틱 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 아마도 저는 그런 진화를 보지 않고 죽을 듯하여 별 고민 안... - -) 

컴퓨터와 비슷하게 중요한 발명으로 언급된 것이 인도-아랍의 숫자체계입니다. 그게 없었으면 미적분도, 뉴턴이나 갈릴레이의 업적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컴퓨터도 등장하지 못했을 테죠. 윈도우즈는 시장을 먼저 장악했다는 사실만으로 세계를 석권했지만, 인도-아랍숫자 체계는 쓰기에 편리했기 때문에 범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외에 리스트에 오른 것들은 전기, 나사, 도르래, 페니실린과 아스피린, 시계, 비행기, 상하수도, DNA, 인터넷, 피임, 핵폭탄, 배터리, 렌즈, 확률론...등등이었어요.

그런데 독특하고 흥미로운 주장이 있었으니, 더글러스 러쉬코프란 학자가 꼽은 지우개가 바로 그것이에요. 그가 말한 '지우개'에는 컴퓨터의 'del'키, 화이트, 헌법 수정 조항, 그 밖의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전 이 분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뒤로 돌아갈 수 없었다면, 과학적 모델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정부, 문화, 도덕도 없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발명들의 가치를 전면 부정한 학자들도 있었어요. 모든 발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거나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꿰뚫은 이들인데, 주로 고고학자들이거나 예술 쪽 학자들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하고 있는 생각/회의도 비슷한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아름다움은 과도한 성취가 아니라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덧: 이 영상을 보고 나니 보르헤스가 선정한 '정의로운 자'들이 두둥실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그의 가치관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게 세계를 구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단어의 기원을 찾아보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 
- 볼테르가 소망했듯이, 자기 정원을 가꾸는 사람, 
- 조용히 체스 게임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의 노동자, 
- 모양과 색깔을 그윽한 눈으로 살피고 있는 도자기 굽는 사람, 
- 책의 내용에는 무관심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책을 잘 만들까 고심하는 조판공, 
- 의견이 다를 때, 상대방이 옳다고 믿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
- 잠들어 있는 동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사람.


덧2: 어느 러시아 사상가는 이런 역설을 선보였죠. "이제 인류는 실현되려는 유토피아를 회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영미 실용주의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이었을 겁니다. 
어제, 일찍 치매를 앓게 되신 친구 어머니를 뵙고 왔어요.  눈부신 과학의 멋진 신세계에서 쪼그라든 뇌로 크기가 축소된 현실을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자 위기구나 싶더군요. 십만년의 시간농축자 호모 사피엔스에게 찾아든 이 위기를 극복할 다른 차원의 발명이 절실합니다. 
    • 그게 만든 사람들의 길이였어요 그들이 안갔으면 딴사람들이 다른걸 들고 갔을거고 누어서 떡먹는 사람 생각입니다 고무지우게가 아니구나 지우게 난 예뻐해요 아니 문방구에 있는건 다 러시아인이 한말 얼른 풀이가 안되네요 바람과 꽃을 보는 사람도
    •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 돌아오는 길의 들꽃이찾던거라는데 동의
    • 인류가 자연을 지배했나요? ㅎㅎ.


      정말 사이버네틱 종으로 변화해서 생로병사를 벗어나게 된다면 인류가 위대한 발명을 했구나 인정하렵니다.


    • 수세식 화장실이 없다니. 이 리스트 인정할 수 없습니다. ㅋㅋㅋ

    • <누들로드>였나 어떤 다큐에서 봤는데, 일본에서는 '인스턴트 라면' 발명한 사람 기념행사를 매년 성대하게 하더라구요. 우리 식생활에서도 인스턴트 라면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보자면, 과연 획기적인 발명이구나 싶기는 해요. 나아가 전세계적으로 존재하는 '국수 형태'의 음식 자체도 하나의 발명이라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가끔은 아마존 밀림이나 아프리카에 사는 부족들의 삶의 방식이, 인간이 동물로서의 분수를 지키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80년대생은 웬만하면 100세까지 살 것이고 2015년생은 142세 정도를 살 것이라 예측하는 오늘날, 이미 바로 옆에 와있는 미래조차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나의 존재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 지우개 저도 한 표, 초기화- 디폴트화-가역성 모두 소중한 개념이라 생각해요. 처음 RPG 게임이 매력적이었던게 언제나 맘만 먹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시작한 이후에는 더 잘 쉽게 할 수 있었던거요. 정치사회적으로도 지우개는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비가역성이 디폴트 값인 사회가 바로 파시즘적 체제니까
    • 여름 한정으로 캐리어씨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 세탁기가 없네요. 손빨래 해보신분이라면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듯. 특히 겨울에. 문자가 있어도 정작 글을 읽을 시간이 없었죠. 세탁기가 보편화되면서 빨래의 중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여자, 일반국민들도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게되었죠. 이런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물적토대가 되는 것.
    • 처음 독립해 나올 때, 제 삶의 모토는 "문명을 비우고 말겠다, 혼자라도!"였습니다.
      제 방에 있던 소형 냉장고와 십년 째 애지중지한 거대한 오디오 시스템이 끌고 나온 가전제품의 전부였어요.  
      하지만 이런 반문명의 삶을 주위에서 가만 두고보지 않더군요.
      가족/친구들이 '너도 과학 발명품의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말겠다!'라고 결의라도 한 듯, TV, 세탁기, 대형냉장고와 김치냉장고, 선풍기, 에어컨이 차례로 제 집 현관을 세차게 노크해댔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공식 흡혈귀가 되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이.... - -
      가장 최근에 들어온 발명품은 친구가 노크도 없이 현관 앞에 버리고 간 '에어프라이어기'네요. (피짜 함 데워봤음.)
    • (이런 발명은 어때요?)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아기 키우는 제 입장에서는 백신도 정말 중요한 발명이 아닌가 싶더군요. 18세기 정도만 해도 5세 이전에 아이가 사망할 확률이 40% 정도 되었다는데, 그런 세상에서 아기를 낳아 키우는 일은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고 조마조마한 일이지 않았나 상상해 보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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