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정의로운 목소리

가난에 대한 어느 남초 커뮤니티의 글이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더군요. 저는 그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해당 커뮤니티에서, 그가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쓴 글을 당시 읽었기 때문이죠. 그는 그 사건에 대해 여자의 공포를 이해하지만, 남자도 남자만의 공포가 있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주 정성스럽게 본인의 경험을 곁들이고 온갖 고뇌를 붙여서요. 저는 그와 지독한 키배도 몇번 했었지만 그 때마다 저는 프로불편러 아니면 트집쟁이로 싸몰렸었습니다. 저도 그를 어쩔 수 없는 진보메일로 분류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는 그가 무슨 글을 쓰고 댓글을 쓰든 구석이 부숴져있는 담벼락을 보는 기분이 듭니다. 그를 기억하다보니 또 다른 댓글도 생각나네요. 여자들의 생리통이 아직도 이렇게 만성적인 이유는 남자가 생리통을 겪지 않아서 그렇다는 남성중심적 의학계를 비판하는 글에, 뇌부터 고쳐야 한다는 댓글을 달았던가...

그는 제게 "좋은 글을 쓰는 남자"의 표상입니다. 통찰력이나 문장력에는 저도 늘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젠더이슈만 가면, 그는 해묵은 아저씨처럼 굴곤 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알 거 다 알고 뻔히 보이는 현실을 저렇게 애써 부정하며 안티 페미니즘의 선봉에 설까. 그는 아니라고 하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올바른 페미니즘을 찾는 수많은 남자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다른 분야의 지식과 통찰력이 아무리 정교해도, 젠더 이슈에서는 기어이 나무위키 수준으로 전락해버리는 그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정의당 같은 인간입니다. 저는 저런 남자들이 계급투쟁에 얼마나 절실한지는 알아요. 그건 진짜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여성이슈만 그 투쟁에서 쏙 빠져있을 뿐.

그 글이 얼마나 훌륭할지 저는 논평할 계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그의 글을 중립적으로 읽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면서 감히 생각해봅니다. 왜 여자들은 남자를 용서하지 못하는지 알 것 같다고. 여성을 비켜나가는 남자의 정의롭고 훌륭한 목소리에, 저는 욕지기부터 올라옵니다. 아주 많은 남자들이 세계 전반에 대한 사색과 분석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세계의 절반을 채우는 여성의 현실과 이를 왜곡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합니다.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제 기분과는 무관하게 좋을 글이겠지만요.
    • 제가 저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묘한 불편함, 어색한 부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게 됐네요. 엊그제 90년대생의 '공정'을 이야기한다며 90년대 여성의 목소리는 쏙 빼놓았던 기사를 읽을 때와 비슷했어요. ㅎㅎㅎ 최저임금 언저리의 노동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여성 노동은 쏙 빠져있더라구요. 심지어 편의점 한다면서 '편순이'조차 등장하지 않더군요. '소주 한잔'에 의탁하는 늙은 몸뚱이...에 여성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아요.

      • 본문처럼 글쓴이의 스탠스를 지적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만 그 글에 여성노동이 쏙 빠져있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게 되는 곳은 보험판매원, 경비용역, 주차용역, 미화용역, 건설용역, 주방보조, 방문판매원 등입니다. 늘 사람이 필요하고 항상 저임금일자리를 제공하는 곳들이죠."


        이 중 보험판매원, 주차용역, 미화용역, 주방보조, 방문판매원은 여성들도 참여할 수 있는 노동입니다. 특히 주방보조는 여성 비중이 높죠. 관점이 그리 넓지 않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론 의식적인 배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 외노자 얘기도 한줄 없더군요.
    • 난민 얘기는 왜 없는지 안 궁금하신가봐요들.

      • 난민은 주제 커테고리가 다르죠. 그 글에서 표현한 건 자기가 접한 가난한 이들인데 여성은 지워져 있으니까 이건 문제 삼을 수 있죠.

        국내 인권 얘기 하면 북한 인권 들고 나오는 누구들이랑 비슷한 사고 방식을 갖고 계시군요.
        • 왜 다른가요. 난민들도 가난하지요. 위에 외노자 얘기도 없다고 하시던데요.

          • 난민은, 정치/사회적 문제로 자기 나라에서 피신해온 사람들입니다. 가난 이전에 사회적 지위 문제가 더 시급하죠. 그리고 우리 나라에 난민 인정된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이런 얘기가 먼저 되어야 할 문제죠.

            외노자는 이미 무시 못할 정도의 숫자로 우리 사회에서 극빈층을 형성하고 있는 노동자들입니다. 시민 사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봐도 되는데 지워져 있죠. 그걸 언급하시는 거라 봅니다.
            • 말씀이 맞네요. 빈정대다가 너무 나갔습니다. 감사합니다.

    • 남자라 페미니스트 분들의 말씀은 뭐가 됐든 일단 조용히 닥치고 경청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만 이런 글 보면 답답해요. 모든 사안에 젠더 이슈가 담길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위에서 말씀하셨듯이 '다른 분야의 지식과 통찰력이 아무리 정교해도, 젠더 이슈에서는 기어이 나무위키 수준'인 사람의 글에서 여성에 대한 관점을 찾아야할 이유가 도대체 뭔가요. 논문도 아니고 그냥 게시판에 올린 글인데.

      • 저도 게시판글에 너무 엄정한 기준을 들이대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지적이 있어야 그런 글을 봤을 때 놓치는 부분이 없는지 되새길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차피 젠더 이슈는 계속 안고 가야하는 문제고, 이런 지적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런 배제(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같은 건 줄어들 수 있겠죠.

      • 저 글에 젠더 이슈가 담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구요. 다만 젠더이슈에는 그렇게 여성에 대한 몰이해를 고집하던 사람이, 노동자 경제적 약자에 대해서는 사려깊은 통찰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게 좀 복잡한 기분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나무위키 수준의 젠더관념으로 전체적인 통찰이 이뤄졌을 때, 또 그렇게 성취되는 공공선과 다수의 이익에서 여성이 배제되는 것은 필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논문 수준의 정교함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디만... 게시판의 생활적 부분에서도 자연스레 배제되고 여성이슈가 논문씩이나 되어야 나와야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다 읽어 본 제가 까놓고 말할게요.

      그 자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큰 문제, 가난의 구조화, 에 태생부터 가장 불리한 출발점에 선 것이 바로 여성인데 그에 대해선 0.0001의 문제 의식도 안보이더군요.

      오래전에 반공노빠들이 드글거리던 서프라이즈에서 흔히 보던 류의 글이라 추억에 젖게 만들더군요.
      • https://ppt21.com/freedom/76488
      • 그 사람의 그런 시야를 탓할 수는 없겠죠... 다만 여성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글에 "남자도 힘들다"같은 글이나 안달아줬으면 하는 바람...
    • 저도 그 글을 읽으면서 뭔가 속시원하지 않음을 느꼈었어요. 그런 사람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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