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원더풀 모먼트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https://youtu.be/Wtd6DvLoCsU


네이버 블로그가 물어봤다. 2019년 가장 좋았던 순간은요? 한 해의 가장 좋았던 순간이 이렇게 명확히 떠오르는 해가 또 있으려나? 몇년간 거지발싸개 같은 순간의 총합 가운데서 그나마 영화 뭐 봤을 때, 혼자 어디 어쩌구를 걸었을 때 이딴 대답이나 하던 게 일상이었는데. 좋았던 순간이란 게 뭔지도 모르겠는 그런 해만 보내다가 주관식 10점짜리 정답을 딱 건진 해가 찾아오니 좀 신기하다. 뭐 많고 많은 즐거운 순간이 있었다. 대전에서 누가 뿅 하고 올라왔던 순간도 그렇고 10년만에 누가 연락을 한 것도 그렇고. 아무튼 다 뭐 이런 순간이 다 있나 싶었지만 대망의 1위는 그렇다.


5월달에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한 순간! 느낌표를 안붙이면 감정이 성립이 안된다. 쩜쩜쩜과 물음표로 점철된 한 해에서 느낌표를 삼백개 정도는 세워놓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본 투 비 블루인 나는 저게 설마 내 인생의 절정은 아니겠지 싶어서 괜히 가라앉을 정도다. 내년 퀴어퍼레이드는 어쩌나 싶어 벌써 걱정이다. 벌써부터 내 미래에 초를 치긴 싫지만 내가 아무리 까불려고 해도 그 때만큼 흥이 날까 걱정이 앞선다. 제주도에서 말이라도 한 마리 공수해오지 않는 이상 그 신나는 순간은 전혀 갱신될 것 같지가 않다. 


저렇게 써놓으면 퀴어 퍼레이드 도중 혐오자들 한 세명을 사냥해서 목이라도 벤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냥 퍼레이드를 보기 전에 와인을 까고, 퍼레이드를 하면서 와인을 까 마시고, 퍼레이드가 끝나고는 뱌뱌 하면서 헤어졌다. 끗. 그런데 나는 그 전까지는 매년 퀴어 퍼레이드에 혼자 갔다. 맨 처음에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출이 어쩌고 일반인들이 어쩌고 떠드는 꼬라지들이 싫어서 일대백 키배를 뜨다가 갑자기 현타가 와서 혼자 갔다. 이 놈들한테 백마디 떠들어봐야 뭔 소용일까 싶어서. 키배를 하든 말든 그냥 갔다온 후기를 올렸다. 효과는 굉장했다...! 퀴퍼 반대자들을 성소수자 차별자로 몰아가지 말아주세요 하면서 울어제끼는 글이 올라왔다. 그 흐느낌이 하도 간곡해서 퀴퍼를 반대하는 인간들까지도 의아해했다. 누가 누굴 몰아가는 글을 썼나요? 빙빙 돌려서 말하는데 퀴퍼에 안 간 네놈이 양심에 찔려한다는 건 너무 잘 알겠구나~ 딱히 놀릴 생각도 없었는데 놀려먹지 않고는 못배길 글을 올리는 통에 한참을 웃었다. 그 다음 해에도 가고 그 다다음 해에도 갔다. 근데 세상 아싸 파티면서 인싸 파티를 혼자 가려니까 나중엔 쪼끔 지겨웠다. 그래서 올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갔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제일 별로인 인간으로 밝혀지는 이 반전이 슬프고 속상했다. 그런데 아무튼 그 때는 매우 행복했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해갔다. 와인도 싸가고, 치즈도 싸가고, 마른 안주도 싸가고, 와인 잔도 싸가고, 깔개도 싸가고. 유난은 떨고 볼 일이다. 아마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와인사랑의 깨달음이 시작된 순간. 쏘주를 극혐하고 맥를 그냥혐하는 내가 이상하게 와인은 술술 잘 넘긴다는 걸 알게 된 건 좀 시간이 흐른 후였는데, 와인 무제한 뷔페에서 촌놈답게 잔 가득히 와인을 따라서 자리로 갖고온 만행을 한 다음인지 퀴퍼에서 와인을 마시는 게 나에게 매우 자연스러웠다. 주님의 피가 막 도는구나... 한강 대교 아래에서 BTS 노래 들으면서 괜히 깝치다가 다음 3일 동안 무릎을 절뚝거려야했던 순간보다 더 신이 났다. 살다 보면 별거 아닌데 그냥 정신적 코카인을 때려박은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잠깐의 조증은 괜찮잖아... 누군지 생각은 안나는데 랩퍼 누가 공연하는 걸 와인 홀짝이면서 보고 있으니까 마구 행복했다. 동행자들은 나의 취기에 슬슬 당황하면서 초면에 면박을 주기 시작했는데 나는 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왜 저래 진짜 온몸으로 던지는 이들의 제스쳐를 무시하고 퀴어킹처럼 혼자 막 신을 내버리고... 돌이켜보면 미안한데 그건 정말 불가항력의 상황이라 좀 양해를 구하고 싶긴 하다. 당신들도 내가 되어봐요! 신이 나는지 안나는지!


퀴어퍼레이드가 쓸데없을 정도로 흥행해서 사람은 바글거리고 쇼핑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행진은 즐거웠고 처음 본 사람들과 뭔가 정치적 액션을 같이 한다는 게 좋았다. 이 때의 기분이 하도 강렬해서 그 다음에도 혹시 만날 일이 있으면 그냥 그 순간의 리플레이 같고 그랬다. 만나기 전에 내가 너무 기대를 해서 내가 그 기대를 다 박살내는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순간을 가능케 했던 건 이 듀나게시판이라는 공간이고 하도 고마워서 듀나님이 쓴 민트의 세계 책도 샀다. 그 때 퀴퍼에서 봤던 사람들이 나보다 책도 많이 읽고 성숙한 인간이라 나도 올해부터 독서를 다시 시작하게 된 것도 굉장한 성취였다. 듀게를 오래 하면 퀴퍼도 같이 할 수 있고 책도 읽고 뭐라도 쓰고 와인도 미치광이처럼 마실 수 있고 그렇다. 


내가 받은 이 좋은 기억을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려나. 다들 너무 안바빴으면 좋겠고 그래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괜히 또 혼자 벼르고 있는 중이다. 아니 그걸 어떻게 잊냐고...



    • 한 15년 전 쯤에 제가 경험한 퀴어퍼레이드는 시민들 반발도 없고 반대시위 같은 것도 없었는데(대신 해맑은 표정으로 "이게 무슨 행사냐"고 묻는 사람은 있었음) 작년 쯤에 인천에서 있었던 퀴어축제는 반대집회도 같이 열리고 포털 댓글은 욕으로 도배돼있어서 시간이 거꾸로 가나 싶었어요 ㅎ

      서울이 아니어서 그런가...

      쏘니님의 듀게에 얽힌 추억과 새해인사인가보군요.
      • 네 그렇습니다... 쓸데없이 궁상인데 잊지못할 기억이네요

    • 제 지역의 퀴어 퍼레이드를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수많은 종교인들로 둘러 쌓여서 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지경이었고 주변은 난리였습니다. 그게 작년이었고 올해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년에는 한 번 가보고 싶네요.

      • 네 잔오님도 꼭 가보세요!! 정말 좋습니다!!

    • 이 글을 읽다보니 문득 퀴어 퍼레이드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전부터 가야지 가야지 해도 뭔가 꼭 이유가 생겨서 못 갔는데 올해는 갈 수 있으려나? 가야겠네요.
      • 가십시오!!!!ㅋㅋㅋㅋ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

    • 전 예전에 2000년대 초반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침 퀴어 축제를 할 때 지나가다가 봤는데, 확실히 행사 규모나 참석자들 모두 자유로운 분위기라 좋더라구요. 우리나라 행사는 기사 사진으로만 봐서..;;

      Sonny님 덕분에 퍼레이드에 참석한 분의 즐거운 기억 공유 글 잘 봤습니다~
      • 제가 퀴퍼를 잘 영업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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