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봤어요

 - 약한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랄 수 있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홍상수 영화에 스포일러랄 게 있을 수가... 있나요? ㅋㅋㅋ


 - 만드는 영화들이 작품성은 널리 인정 받아 이름은 유명하지만 흥행은 잘 안 되고 바라지도 않는 영화 감독 정재영씨가 나옵니다. 일찌감치 결혼한 유부남이고 애도 둘 있죠. 영화 찍을 때마다 여배우들 꼬시는 바람둥이라고 소문도 나 있고 뭐 그런 사람인데 암튼 이 분이 자기 영화 상영회 참석차 수원에 내려왔는데 일정 착각으로 하루가 붕 떠서 화성 행궁 구경을 가는 거죠. 거기에서 늘 그렇듯 동네 미녀를 만나는데 그 미녀는 전직 모델(...)이었다가 이제는 그림을 그린다네요. 암튼 우리 감독님은 그녀와 자고 싶고 그래서 어색어색한 분위기에서 막 들이대며 아무 말 대잔치도 벌이고 함께 술도 진탕 마시고 주사도 부리고 그럽니다. 한 마디로 평상시 홍상수 영화...


- 전부터 꼭 보려는 영화였습니다. 상수와 민희의 러브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촬영지가 제 생활 무대라서요. 실제로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 중 상당수는 제 출퇴근 길이고 꽤 오래 나오는 카페도 몇 번 가 본 곳이고 그랬어요. 그러니 일단 영화 선택의 목적은 달성했죠. 나중에 김민희가 서 있던 빵집 앞 건널목에 가서 꼭 김민희가 밟고 있던 그 블록 위에 서 볼 겁니...


 - 영화 전체 런닝타임을 반으로 뚝 잘라서 같은 상황을 다른 버전으로 두 번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 수정'하고는 달라요. 그게 좀 라쇼몽스런 놀이였다면 이 영화의 앞 뒤 이야기는 그냥 평행 세계 같은 겁니다. '인생극장' 쪽에 더 가깝겠네요.
 좀 흥미로운 점이라면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그냥 전형적인 홍상수식 이야기(여자랑 한 번 자려고 몸부림을 치는 찌질한 남자 이야기)인데 반해 다음 이야기는 로맨스(!!)에 가깝다는 겁니다. 홍상수 버전의 '비포 선라이즈'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런 분위기 차이는 주인공 감독 캐릭터의 변화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 놈이 그 놈인 건 맞는데, 두번째 이야기의 감독 놈은 그나마 좀 철이 들었고 매우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있어요. 그래봤자 홍상수 주인공이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상대평가로 말이죠.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김민희입니다. 사실 김민희 캐릭터도 앞쪽과 뒷쪽이 미묘하게 다른데, 거기에다가 감독 캐릭터의 변화가 맞물려서 두번째 김민희는 굉장히 설레는(?) 캐릭터가 됩니다. 홍상수 캐릭터답게 칙칙한 현실의 질감이 얹혀 있으면서도 이렇게 샤방하고 설레는 느낌이 나는 건 배우 김민희의 비주얼 + 역량 덕이 아닐까 싶었네요. 연기 참 잘 해요. 꼭 본인 얘기 하는 것처럼(!) 말이죠.


 -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철 없던 우리 상수가 드디어 철들었어요!'라며 호평을 하기도 했던데. 이 영화의 공개 즈음에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글쎄요;;
 사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셀링 포인트이자 단점입니다.
 영화 감독과 전직 모델의 캐릭터가 현실의 홍상수, 김민희와 닮은 데가 너무 많아서 둘의 러브 어페어와 별개로 떼어 놓고 봐지지가 않는 이야기거든요.
 가십거리로서의 떡밥들이 넘쳐나서 도무지 그걸 외면할 길이 없죠. 또 그렇게 보면 정말 불건전한 재미가 넘쳐나는 영화이구요.
 하지만 그렇다보니 보면서 계속 찝찝한 기분, 종종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흠... 정말 두 분 왜 그러셨는지. orz


 -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평소의 홍상수스런 영화이지만 뒷쪽 이야기의 예상치 못한 로맨틱 분위기 때문에 좀 새로운 느낌도 있고 그렇습니다.
 어쨌거나 평소의 홍상수 영화들을 즐기신 분들이라면 재밌게 보실만한 영화구요.
 다만 홍상수, 김민희의 개인사를 불쾌하게 여기시는 분들이라면 멀리하시길 권해봅니다.



 - 덧붙여서 윤여정도 나오고 고아성, 유준상에 기주봉 최화정 서영화도 나와요. 다들 비중은 크지 않지만 최화정이 꽤 웃겨줍니다. 사실 전 이 분을 어렸을 때 가을인지 겨울인지 소나탄지 뭔지 하는 드라마에서 되게 좋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이렇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반갑더군요. 뭐 그냥 최화정 본인을 연기하는 느낌이긴 합니다만. ㅋㅋ


 - 야한 장면 하나도 안 나오고 폭력도 없고 욕설도 거의 없지만 19세입니다. 홍상수가 '내 영화를 애들이 봐서 뭐해?'라는 마음으로 걍 매번 19금으로 해달라며 심의를 넣는다는 얘기도 있던데 사실인지는. 그리고 뭐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요. 두번째 이야기에서 정재영이 주사 부리는 장면을 생각하면 애들은 안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제목의 '지금'이 두 번째 이야기이고 '그때'가 첫 번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본인이 철든 이야기를 의도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음... 왜 그랬냐구요;;;
    • 두번째 이야기에서도 기겁할 만한 부분이 있었죠. 같이 있기 불편해서 주사로 인해 여성들 앞에서 하의를 훌러덩 까는...(...) 홍상수가 사석에서 그런 사람을 본 기억이 있어서 그 장면을 찍었다고 하는데 하여간 술이 문제인지 사람이 문제인지...;;

      • 그 장면이 없었다면 감독 캐릭터가 너무 나이스(...) 해져서 홍상수 영화 느낌이 안 났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장면 덕에 언제나처럼 "저런 남자랑 엮이지 마!!!!" 라고 여자 캐릭터를 걱정해줄 수 있어서 맘 편하게 봤습니다. ㅋㅋㅋ
    • 행궁근처 빵집이면 꼼빠도르인가요ㅎ
      • 역시 수원 잘 아시는 메피스토님. ㅋㅋㅋ

        이젠 유행 뒤쳐진 옛날 빵집 됐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더군요.
    • 홍상수 영화는 초기작 몇개 빼고 다 봤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가장 재밌게 보는 감독입니다
      • 팬이시군요! ㅋㅋㅋ

        전 일부러 챙겨보진 않고 가끔 호감가는 배우 나올 때만 찾아보는데 매번 킬킬대며 지루하지 않게 보긴 합니다.
    • 자기 영화 19금 거는 건 그나마 좋네요. 전 그 커플 딱히 문제삼지 않아요. 가정파괴범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금 간 부부 같고. 어차피 댓가는 치르게 돼있고;

      전 이 영화에서 그 스시집이었나?거기서 술 마실 때, 정말 벌어진 입이 안 다물어지게 오글거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요리사는 무슨 죄로 저 대화를 들어야하나 싶고.
      •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 작업 멘트들이 다 그렇지 않나요? ㅋㅋ 근데 그렇담 그게 정말로 먹힌단 얘긴데... 엄...;;
    • 어쩌다 본 영환데 익숙한 곳이 보이길래 '어라? 혹시...?' 하며 보니 저도 몇차례 행궁 쪽에 놀러갔을 때 지나다니던 곳이더라구요.ㅎ 최근에 가본 게 작년 가을쯤인데 스시집이랑 카페 쪽 블럭은 가게들이 바뀐 분위기지만 행궁 넘어 반대쪽 블럭은 많이 바뀌었더라구요.
      • 행리단길(...) 조성을 위해 수원시에서 돈을 좀 풀어서 작고 트렌디한 가게들을 지원해준 게 성과를 봐서 요즘 그 주변으로 시 차원에서 지원을 계속하면서 여기저기 많이 변하고 있어요. 수원에서 오래 살았던 입장에선 그 시간이 멈춘 듯한 낡은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 이런 분위기가 훨씬 좋겠죠.




        그래도 홍상수답게 영화에는 행리단길스럽지 않은 가게들만 나오더라구요. ㅋㅋㅋ

    • 이거 완전 뻘플이라 죄송한데요;;


      찍어준 사진을 보면 그 사람이 나(특히 외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이 된다...라고 저는 생각해 왔거든요.

      이 영화는 그 생각을 또 하게 만들어요. ㅋㅋ


      원래 그냥 다 떠나서 무조건 이쁘게! 인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최소 홍 감독이 그런 사람일 리가...

      • 뻘플 아닙니다. 정말로 홍상수 영화에서 혼자 그렇게 로맨틱 코미디 비주얼로 존재하는 생명체는 없었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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