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주인공

옛날 얘기를 좀 해볼까 해요.
어릴 때 저희 집은 서울 근교의 작은 도시였거든요. 버스를 타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리는. 대학에서 만난 동기들이 종종 야 우리 집보다 너네 집이 더 가까울 걸 했던 기억도 나요. 고척동이나 강남 쪽에서 학교를 오려면 차가 막혀서 괴롭다며 그런 말들을 하곤 했었죠. 전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역까지 저를 바래다주러 와서 신촌역쯤에 내리는 게 나름 이벤트였던 동기들의 웃음소리도 떠오르네요.

제가 초등학교 때 큰언니는 서울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었고,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는 대략 10분, 느린 걸음으로는 대략 15분 정도 걸렸거든요. 그 시절의 얘기를 해볼까 해요. 북쪽에 가까워 서울보다 더 추운 그 동네의 겨울 인도에는 절대 녹을 것 같지 않은 딱딱한 눈들이 발라져 있었죠. 음 그건 바른 게 정말 맞았어요. 그런 건 쌓였다고 부르면 안 됐거든요. 큰언니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늘 엄마가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가셨어요. 며칠의 착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 기억 속에서 엄마는 단 하루만 빼고 마중을 거른 적이 없으셨어요. 큰언니랑 엄마가 들어오면 늘 차가운 겨울 냄새가 났었죠. 언니가 옷을 벗고 씻는 동안 엄마는 오징어를 굽거나 귤을 까거나 베란다에 놓아뒀던 식혜를 가지고 와서 큰언니와 엄마랑 저랑 대략 한두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수많은 대화중에서 깊이 각인된 한 마디는 어느 날 엄마가 “이제 내가 나이가 더 들면 너네들 이렇게 식혜도 못 만들어주고 같이 오징어도 못 씹겠지...” 하시던 표정과 음성이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무섭지만, 노쇠함에 대한 예감이란 게 딱히 틀리는 법은 없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큰언니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어요. 바로 엄마가 너무 아프셔서 마중을 못 나간 단 하루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녀는 언제나 킬힐에 칼정장을 입고 다녔어요. 당시에 물론 어린 제 견문이 부족해서일수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우리 도시에서 킬힐에 칼정장을 입고 캐시미어 롱코트를 입은 그 또래 여자는 우리 큰언니뿐이었을 거예요. 그녀는 구두를 언제나 수제화 살롱에서 맞춰 신고 다녔죠. 신발이든 옷이든 맞춤으로 신고 입어야 사람이 귀티가 난다는 둥 뭐 그런 지론을 펼쳤던 기억이 나요. 또 당시에 나와 있던 기성 구두들은 디자인이 그닥 날렵하질 않았거든요. 여튼 그런 맞춤 킬힐 덕에 그녀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길어진 다리를 가질 수 있었고 목을 더 빳빳하게 들고 다닐 수 있었죠.

그날 밤 늘 자주색 패딩 코트를 입고 기다리던 엄마 없이 언니가 등을 곧추세우고 시선을 또렷하게 정면을 마주하면서 눈이 발라진 빙판길을 당당하게 걷고 있을 때였어요.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의 밤하늘의 별들은 고고하게 빛났고 집으로 향하는 그 널찍하고 새하얀 빙판길엔 주황색 가로등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죠. 언니는 홀로 화사한 조명 아래 높은 하이힐을 신고 빙판길을 유유히 횡단하는 자신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그 길에 다른 걸음 소리가 들려온 거죠. 언니의 뒤를 쫓아 저벅 저벅 거리는 그 발걸음 소리에 언니는 뛰어야 하나? 반사적으로 생각했지만, 하이힐을 신은 채 뛰어봐야 미끄러질 게 뻔하고 하이힐을 벗어들고 뛰자니 너무 우스꽝스러울 것 같고. 게다가 그 발걸음 소리는 웬일인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 어디서 많이 들은 발걸음 소리 같기도 했다고 해요. 신기하게도 그 느낌은 적중해서 언니 이름을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언니는 일단 마음이 놓였대요. 그건 그녀의 초등학교 동창생인 준모였어요.

준모구나. 언니가 뒤돌아서며 자세를 좀 더 바로 했고 한겨울의 매섭고 쓰린 바람이 그녀와 준모의 얼굴을 때렸죠. 검은 타이츠에 힐과 코트는 우스꽝스럽다며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다리는 많이 굳어 있었어요. 준모는 예의 그 옥수수 같은 모양을 하고 위태롭게 서 있었다고 해요. 초등학교 때 준모를 보면서 언니는 항상 쟤는 옥수수야.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꼭 옥수수가 잎사귀를 펄럭대면서 걸어 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성인이 돼서도 준모는 여전히 옥수수 같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좀 옥수수가 많이 커졌다는 정도였어요.
그때 준모가 외투 안에 품어 놓은 군고구마를 주섬주섬 꺼내며 군고구마 먹을래? 하는 순간언니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회사에서나 짓는 미소를 지었다고 해요. 그 미소와 동시에 그녀가 등을 돌려 다시 우아한 걸음걸이를 시작하려는 순간 준모가 잎사귀를 펄럭이며 다급하게 말했어요.

"너 결혼한다며?"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등을 돌려 준모를 바라봤죠. 또 남의 말 좋아하는 동창 애들이 수군댔나 보군 아 이런 좁은 동네 정말 싫다. 그녀는 냉랭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준모를 향해 입을 열었어요.

"누가 그래, 나 결혼 계획 없어."

"소문 다 퍼졌어 너 내년 봄에 결혼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떠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냐."

이번엔 그녀가 좀 더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등을 완전히 돌려 빠르게 걸음을 내딛는 순간, 준모가 다시 뒤에서 말을 걸었어요.
 
야.
 
언니는 순간 짜증이 치밀었대요. 어디서 옥수수 잎사귀 같은 게 정말.....
 
"야 너 결혼한다며."

언니는 드디어 울컥해서 지금 내가 희롱당하는 게 맞구나 싶었대요. 세상에 저 옥수수가 돌았나 나한테 틈이 어디 있다고 저 옥수수가 나를 놀려 먹으려는 거지. 언니는 뭐라고 쏴붙여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준모를 상대하는 순간 준모가 예의 그 더듬거리는 말투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절댈 게 뻔했기 때문에, 쏴붙이는 건 포기하기로 했죠. 걸음을 빨리 걷자!! 시야에서 사라지면 더이상 말을 걸지 않겠지. 언니가 준모의 말에도 흔들림 없이 계속 걸어가자 준모가 말없이 따라오더래요. 그녀는 계속 준모를 무시한 채 집으로 향했어요.

“저기.....잠깐만 서 봐.”

그녀는 계속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죠.

“저기, 그 소문 누가 냈는지 가르쳐 줄게.”

비로소 그녀는 걸음을 멈췄어요. 짐작이 가는 인물은 따로 없었지만, 뜬금없이 결혼한다는 소문을 마음대로 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였죠.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에는 무시만 할 게 아니라 정확히 대응하고 항의를 해서 바로 수정을 해야 한다는 게 언니의 평소 지론이기도 했고요. 회사에서도 그런 발 빠른 대응 덕에 언니는 늘 소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수 있었고 그건 그녀의 빈틈없는 자존심 생활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어요. 소문이 없다는 것. 나의 큰언니는 그런 것에 만족하고 행복감에 젖어드는 사람이었죠.

"누군지 말해봐."

"......"

"누군데."

"......"

"누구냐니까?"

"저기 근데 이거......"

옥수수가 주섬주섬 등에 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것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죠. 다 꺼내진 그것은 빨간색 패딩 코트였대요.

"저기.. 이거 어머니 갖다 드려. 너 기다리시면서 겨울마다 늘 자주색만 입으시던데. 아 그리고 군고구마 이거 좀 먹어봐. 그리고..... 소문 말이야."

엉겁결에 떠넘기는 빨간색 패딩 롱코트와 군고구마를 받아든 채 그녀가 회사에서나 짓는 미소를 찾지 못해 허둥대던 찰나에 준모가 말했어요.

"소문 그거, 내가 낸 거야."

화사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 사이로 커다란 옥수수가 잎사귀를 펄럭거리며 빙판길을 가로질러 멀어져갔죠. 마침내 집에 도착한 언니가 군고구마를 하나 꺼내 들었을 때, 준모의 품속에 있어서 꽤 따뜻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건 너무도 차갑게 식어 있었고, 빨간색 패딩 롱코트의 접힌 주름은 그 다음 날이 되도 펴지질 않았답니다.
    • 그때 추운 겨울 실감이 나요 요즘은 진짜겨울이 아닌데 춥네요 겨울은 겨울이라서 몸이 그렇게 반응을 해요 준모는 옥수수 수염이 윈가 아랜가 궁금하고 멋쟁이 언니는 아주머니가 되셨겠고
    • 뭔가 후속편이 있어야 할것 같은....

    • 그 시절(...이 정확히 언제쯤일지는 제가 모릅니다만)에는 나름 재밌고 낭만적인 에피소드...


      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그보다는 스릴러의 비중이 커지는 이야기네요. ㅋㅋ

    •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 즘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는 이야기네요.


      식은 고구마는 그만큼 오래 기다렸다는 의미겠지만 펴지지 않는 주름과 함께 별로 잘 전달되지 못한 어떤 ‘마음’의 눅눅한 결말 같고

    • 너무 재미있어요. 옥수수같은게... ㅋㅋ 또 써주세요.
    • 오 글이 좋아서 할 수 없이 로긴했네요.
    • 1990년이에요. 손전화가 없던 시절의 얘기죠. 얼마나 오래 기다렸음 품 안에 있던 군고구마가 다 식었을까 그리고 패딩이라는 옷이 그게 주름이 잘 안 지잖아요. 얼마나 그걸 가방 안에 넣고 다녔음 그 다음날이 돼도 주름이 안 펴지는 건지.... 어린 마음에 준모의 감정이란 뭘까 그런 생각을 한동안 했던 것 같아요.


      이 이야기가 제 마음에 각인된 이유는 또 다른 부분인데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으면서, 고백 같은 고백 한 마디 못했으면서..... 군고구마와 패딩 점퍼를 건네준 그날 이후로 준모는 단 한 번도 언니 앞에 나타나지 않았대요. 우리 엄마가 늘 자주색 패딩을 입으신단 것과, 엄마가 마중 나가지 않은 그날 딱 하루 언니한테 다가온 걸 보아하니 늘 기다리면서 기회만 엿봤던 것 같은데..... 준모는 신기하게 그날 이후로 언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질 않았대요.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궁금한 지점이에요. 처음엔 구애의 목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준모는 그저. 패딩점퍼를 꼭 언니한테 건네는 목적에 함몰됐던 것인지. 또는 군대....? 흠. 가끔 군고구마를 보면, 그걸 품 안에 넣고 추운 빙판길 위에서 동동대며 큰언니를 기다렸을 준모를 떠올리곤 해요...
      • 관찰자 시점인 은밀한 생님께서는 그당시 어렸으니까 모를거라 예상됩니다.


        어쩌면 언니가 준모의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죠. 군대에 갔다거나...뭐 어디 취직을 했다거나...


        그리고, 일반적으로 열번찍는 남자는 없어요.


        이만큼했지만 안되는 인연인가보다 하고 스스로 위안을 하는 경우가 많죠.


        ㅋㅋ, 그 이만큼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거고, 대상이 되는 여성은 알수가 없겠죠.  ^^

    • 우와. 재미있어요. 하지만 다시 읽어도 준모 이야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걸요. 휴대폰도 없던 그 시절, 자정 넘은 시각에 빙판길 위에서 불현듯 다가온 남자 동창이라니.. 게다가 빨간 패딩과 소문의 근원까지.
    • 내가 차버린 똥카 킹카되어 복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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