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아워스>와 마이클 커닝햄+ 필립 글라스

어제, 부산에 일보러 갔다가 올라오는 KTX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대학생인 듯) 노트북으로 보는 영화를 강제 감상했습니다. 
이어폰을 착용해서 소리는 안 났으나 그 좁은 옆자리에서 영상이 번적거리니까 읽던 책을 접게 되더라고요. - -  작품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아워스>였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버지니아 울프와 남편이 역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장면이에요.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역 플랫폼에서, 두 사람은 머물 것인지 떠날 것인지에 대해 말하며 지난 시절을 반추하죠. 애정과 갈등이 번갈아 표면으로 떠오르는 얽힘의 그 장면.
얽힘은 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콤플렉스입니다. 콤플렉스 없이 텍스트에 긴장은 생겨나지 않아요. 어제 다시 보면서, 저는 그 장면이 어쩐지 바닷가의 정경 같다고 느꼈습니다. 
역의 플랫폼은 바다가 그렇듯이 항상 저편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까요. 사실 프랫폼으로 무연히 드나드는 기차들은 출렁이는 파도와 닮았죠. Escape에 대한 욕구의 암시로서, 역 플랫폼은 그 동요와 일렁임을 담백하게 전달해주는 미장센입니다.

운명과의 사랑에 이르는 길에도 다양한 양상이 있을 거예요. 이 영화에서 울프가 보여주는 것은 절박함을 통한 사랑으로 이른바 순전한 헌신입니다.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사람이 수면에 닿기 전까지 공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수면과 부딪치고 바다 속으로 잠수하기까지의 그 과정에 무엇이 끼어들 수 있을까요?
낙하에의 몰두. 절망을 통한 그 몰두가 바로 운명애의 본질이라는 것을 울프의 삶은 보여줍니다. 절망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순간의 그런 순전함은 아름다운 동시에 암담하지요.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2.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The Hours>O.S.T를 들었습니다. Philip Glass의 음반을 처음 구입한 게 이 영화를 보고 나서였어요. 부클릿에 실린 마이클 커닝햄의 글이 좋습니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에 나는 참으로 간단히,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노래를 못하고, 악기를 다루지 못하고, 소나타를 작곡할 수 없으므로 나는 소설을 쓴다고.
문학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만약 외계인이 와서 "예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뭐냐"고 지구인에게 묻는다면, 바흐의 음악을 떠올리지 톨스토이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문학도 음악에 비하면 지엽적인 작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켄타루스좌에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음악은 거기서도 연주될 수 있다.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창조할 능력이 없기에, 나는 매일 아침 글을 쓰기 전에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쓰는 글들이 슈베르트나 밴 모리슨, 필립 글라스의 음악처럼 리듬감 있고 마음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들은 하나의 사운드 트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음악이 알듯 모를듯 - 그러나 분명히 - 소설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특정한 음악과 내 소설을 연결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A Home at the End of the World ]가 로리 앤더슨의  'Big science'와 조니 미첼의 'Blue', 모짜르트의 '레퀴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Flesh & Blood]는 베르디의 오페라, 닐영의 'After the gold rush'와 스미스의 몇몇 앨범, 제프 버클리의 'Halleluyah'(레너드 코헨이 표지에 나오는)에서 비롯된 것이다.

<The hours>에는 슈베르트(특히 '죽음과 소녀'), 브라이언 이노의 'Music for airports', 피터 가브리엘의 'Mercy street',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가  들어가 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항상 들어온 음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필립 글라스의 작품이다. 나는 글라스의 음악을 같은 이유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만큼이나 좋아한다. 

글라스는 울프가 그렇듯, 시작하고, 절정에 오르고, 끝이 나는 것보다는 지속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울프처럼 글라스는 아름다움이란 과거나 미래와 연관된 현재가 아니라, 현재라는 순간 그 자체에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글라스와 울프는 뭔가를 서술하는 것보다는 관조하는 것이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전통적인 이야기를 파괴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반복을 감싸안지 못한다면, 그 결과  삶의 많은 부분 - 리듬과  영원히 이어질듯한 미묘한 변화들 -을 놓치게 될 것이다."

3. 필립 글라스에 대해선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작곡가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예술의 한 면에 기억(과거)과 예감(미래)을 넘나들며 구성되는 현재가 서 있다면, 글라스의 음악은 그런 연관이 없는 절대적 현존을 표현하는 듯싶어요.
그런데 위의 글로만 보자면, 글라스의 음악에 대한 커닝햄의 이해에는 서술과 관조에 대한 혼동이 섞여 있습니다. <행동하는 것 la vita activa>과 <관조하는 것la vita speculativa>의 대비는 가능하겠지만, '쓰기'와 '관조'는 대조를 이룰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음악은 순수한 소리의 흐름이죠. 음악의 진행과정은 말 그대로 진행 그 자체, 흘러감이라는 현상체험입니다. 그런 점에서 음악은 관조와는 상관없는 것 아닐까요. 음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쓰기 방식을 관조적 글쓰기라고 말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음악에 대해 시각적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크 시대의 독특한 공감각 이론에 기초한 '회화 음악'에나 해당되는 해석이 아닐런지.
음악은 청각을 통한 울림을 처리하는 과정이므로, 글라스의 음악이 '이야기'를 파괴한다는 커닝햄의 말이 얼마나 타당한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Philip Glass Morning Passages (The Hours OST)
https://www.youtube.com/watch?v=UlYHNRAGyDc


    • 영화는 좋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도 안 나는데, 링크해주신 음악이 참 좋군요.
      • 사물의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걸 증명해보이는 듯한 음악이죠.   


        나디아 블랑제의 이 곡도 취향에 맞으실 듯.   https://www.youtube.com/watch?v=YfcUkVbyy9M


    • 저도 기차역 장면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어요. MINE~!!! 이라고 소리치던 키드먼의 연기가 참 좋았죠. 제발, 스스로 기꺼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저 심정을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허허
      • 저와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심심찮게 있네요. :)


        키드만이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그 기차역 씬에서의 연기 - + 대사- 덕이라 믿고 있을 정도랍니다. (에취!)


        • 네, 저두요. 솔직히 코까지 붙여가며 이 배우에게 맡겨야했나? 의문과 불만이 좀 있었어요 저는.^^;
    • 3.

      서술, 관조는 단선적인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음악적 도구로써 표현 방식을 말한 듯 싶습니다. 커닝햄이 언급한(특히 디 아워스속) 슈베르트, eno, mercy street, ok computer, 그리고 필립 글라스는 하위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음(과 화성들),리듬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제자리, 즉 현재의 반복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음악(가)들인것을 알 수 있거든요. 그런 반복적인 음의 진행을 통해 집중하는 것을 커닝햄은 현재의 관조라고 본 듯 하구요. 필립 글라스의 곡들이 아주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던 시기나(music in 12parts) 그 이후의 대중적인 작품들 모두. 슈베르트 역시 동시대 베토벤과 비교하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커닝햄이 언급했던 죽음과 소녀 특히 2악장/베토벤 후기 현사들. 현사가 아닌 가곡의 비교로 보면 더 드러나구요.)


      디아워스 소설과 영화 모두 보진 못했지만 마이클 커닝햄의 장르를 넘나들며 일관성있는 선곡을 보니 그의 음악적 견해가 얼마나 깊고 넓은 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서두에 밝혔던 작곡을 못하기에 소설을 쓴다는 말은 꼭 그의 책을 읽어보게 합니다. 좋은 글 소개 감사합니다.
      • 음. 음악 전공자의 포스가 스윽 느껴지는 설명인데요? ㅎ
        커닝햄의 소설은 심리적으로 세밀하고  긴장감 넘치는 세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처음 읽을 땐 부담감이 있을 수도 있어요.  
        이 영화의 원작 <세월>은  그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 갖는 실험적 기법들을 확장한 작품이니까 울프의 소설들 - <the years>, <델러웨이 부인>- 을 먼저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저는 이 영화에서 글래스 음악이 너무 지나치게 쓰인 감이 있지 않나는 생각을 해요. 매 순간 중요한 실존주의적인 순간이야라고 강조하듯 계속 나오니 영화끝나고 프로작이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요. <트루먼 쇼>에서는 그 정도로 과하게 쓰이지 않았습니다.


      니콜 키드먼은 이 때 보여 준 연기방식을 콜린 퍼스랑 나온 영화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더군요. 그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듯 한 목소리 말이예요. 아마 가짜 코 붙이고 안 나왔으면 이 영화에서의 그리 주목을 받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울프와 닮지도 않았고요. 결정적으로 눈이 너무 달랐어요. 울프의 부드러운 작가적 몽상에 찬 눈이 아니라 야심으로 드글거리는 날카로운 눈. 버지니아 울프를 정말 닮았다고 느낀 배우는 윌렘 데포r가 t.s.엘리엇으로 나온 <톰 앤 비브>에서 버지니아 울프로 등장했던 배우였습니다. 니콜 키드먼도 자신의 최고연기 중 하나로 뽑지는 않더군요.


      저는 1950년 대의 중산층 가정 주부, 로라 브라운으로 나온 줄리앤 무어의 연기가 이 영화의 심장이었다고 생각해요. 무어는 원작을 선물받고 이 영화의 모자 관계가 감동적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필립 글래스 좋아하시면 Max Richter도 추천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Bb0k9HgQxc




      저는 울프의 글쓰기는 음악보다 영화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울프는 영화의 가능성을 높이 봤기도 했고요.

      • 글라스의 음악은 이 영화의 키워드 '반복'과 잘 어울리는 탁월한 조화로움이었다는 평에 반하는 이견을 처음 접해요.  프레이즈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선율이라 그런 느낌을 받으셨을까요. 


        추천하신  막스 리히터의 음악은 저도 좋아해요. <Dream 13 >으로 입문해서 아이튠즈로  8시간의 풀 버전 <Sleep>까지 감상한 바 있답니다. :)


        (댓글 다는 동안 카톡이 자꾸 와서 오락가락했더니, 길게 썼던 답이 다 지워졌어요.윽)






    • 저는 '케잌을 만들거야'가 좋았습니다.





      • 다시 들으니 음악이 특별하긴 했네요
        • 음알못이지만 모차르트 25번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 아하 이거슨 아마데우스 시작 부분에 나오던 유명한 곡이군요.
            • 아마 맞을겁니다 ㅎㅎ

      • 저는 이 곡을 듣노라면 이 음반 속 다른 곡들 보다 불안하달까, 긴장감이 커져서 반복해 듣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근데 이상하게도 이 곡을 들으면 그가 수학과 철학 전공자였다는 게 환기돼요. 


        (제가 동경하는 학문이 1.물리학 2.수학 3.철학이라는 건 안 비밀~ ㅋ)

    • 관조라는 표현을 보니 스티브 라이히의 초기 미니멀리즘 곡이 하나 생각이 나는데(Piano Phase, 1967), 한 마디 짜리 멜로디를 두 대의 피아노가 계속 반복 연주하는 음악이에요. 하나의 멜로디를 함께 연주하되 다만 속도를 아주 약간만 다르게 하는 거지요.

      그 결과 처음에는 두 악기가 동시에 함께 연주하는 것 같다가, 점점 페달을 밟은 것처럼 소리가 늘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한 음 정도 속도 차이가 나면서 부터는 화음이 생기기 시작해요. 청중 뿐만이 아니라 작곡가 자신 마저도 그야말로 팔짱을 끼고 들으면 되는 곡이지요. 멜로디, 악기, 속도, 그리고 몇 분간 연주할 것인지만 정해놓고 나면 그 다음 부터는 스스로 진행되어 가는 음악이니까요.

      물론 필립 글래스의 영화음악은 그런 초기 미니멀리즘 작품과는 다른 점도 많지만, 반복이라는 큰 테마나 고전적 의미의 기승전결이 두드러지지 않는 점, 작곡가의 개입이 비교적 적은 점 등 미니멀리즘의 기본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에, 이런 면에 대해 관조성이 있다는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 댓글을 이제야 봤네요.


        라이히의 <Different Trains>을 듣고 그 기차가 달리는 소리 배경으로 깔린 사이렌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현악기 소리의 조합에 울컥했더랬습니다. 오랜만에 들어볼까 하다가 감정이 버틸 것 같지 않아 포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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