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와의 대화 8 (한 친구를 기억함)

머저리> 명절이면 우리집에 와서 묵고가던 형 생각난다.  별명이 八大山人이었던 형.
머저리누나> 갑자기 왜?
머저리> 올 때마다  내 방에서 잤잖아.
머저리> 한번은 잠자리에서 보들레르의 시 <파리의 우울>을 암송해주는 거야. 불어가 그렇게 예쁜 언어인지 첨 알았어.
머저리누나> 언어감각이 뛰어난 편이었지. 

머저리> 웬지 그 형을 볼 때면 자부심이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떠올랐어.  평범한 사람들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자부심말야.
머저리> 한번은 그런 속내를 비쳤더니 "내가 남보다 한시간 일찍 가는 시계이긴 하지" 라며 씩 웃더라. 그 표정이 생각나네.
머저리누나> 세상의 유동하는 흐름을 남보다 먼저 파악하는 편이긴 했지.
머저리누나> 근데 남들을 한 수 아래로 보진 않았어. 오히려 두려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지.

머저리> 그 형이 내게 연필화도 가르쳐줬잖아. 사물 보는 법을 배우는덴 최고라며.
머저리누나> 그랬구나...
머저리> 누난 날카로운 사람이고 난 둥근 사람이라는 평도 했지.
머저리누나> (피식) 술대작에서 내게 졌기 땜에 꽁해서 한 험담이었을 것임.

머저리> 사물을 명명하는 법도 가르쳐줬는데.
머저리누나> 음?
머저리> 무서운 단어에는 색을 입혀 표현해 보랬어. 녹색 여우, 노랑귀신.... 이렇게.
머저리> 선승의 안광처럼 날카롭던 그 눈길이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
머저리누나> .......
머저리> 그곳에서도 세차게 생각을 뒤채며 엄청난 생동감과 박력을 뿜고 있겠지?
머저리누나> ........ 

* 십 여년 전, 그가 갑자기 세상을 버리고 떠났던 날. 
비보를 접하던 순간에도, 병원 빈소에서 영정사진 앞에 섰을 때도, 그의 몸을 태우는 화장터 불길을 보면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오열하는 옆자리에 서서 아,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눈물이 안 나지? 의아해서 마음이 점점 무덤덤해졌던 기억만 있어요.
그의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감귤농사를 지으시는데, 올 설에도 어김없이 한 상자 보내주셨습니다.
나이 드는 현상인지 빈 위장이 꼬르륵 소리를 내서 몇 알 씻어 먹다가, 괜히 울컥해서 어제 오후 막내랑 뒹굴거리며 나눴던 대화를 적어봐요.

49젯날,  잠이 오지 않아 잡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더랬습니다.
" 미국의 어느 약국에서 팔고 있다는 목각의 작은새, 그 날개 아래 장식 나무판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나는 새. 나는 뒤로 날아가요. 왠지 어디로 갈까 앞으로 가기보다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죽음은 사람이 그저 뒤로 나는 것이다."

    • 머저리=조국을 지지하지 않는 이 게시판의 모든 사람...이라는 어떤 분의 주장이 생각나 잠깐 깜짝 놀랐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머저리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출동하시는 ㅋㅋㅋ

        • 제가 듀게를 건성건성 읽는 걸까요? 이 댓글의 배경을 모름. ㅋ

          • 도야지님이 조국이슈와 관련해 글 올리실 때 "게시판 머저리"라는 표현을 자주 쓰셔서 집은 거에요 ㅎ 요샌 안그러시나 봐요.
            • 아하~ 제목에서부터 조롱기 가득하고 내용이 훤히 보이는 글은 클릭 안 해서 모름. - -
      • 언젠가 한 유저가 막내와의 카톡 게시글에다 머저리라는 단어가 불편하다는 댓글을 남기셨어요. 가족 단톡방에서 막내가 스스로 지어 쓰는 닉네임이라 그냥 쓰는 거라 설명했고요.
        저는 이 단어가 울 할머니가 저희에게 사랑을 담아 쓰시던 '똥강아지'라는 표현처럼 저항감 1도 없는데, 이런 공개 게시판에서 대하기엔 불편한 단어인가 봅니다. 근데 막내와의 대화 기록은 앞으로도 저 단어를 계속 제목으로 붙이게 될 테니 양해바라요.  -_-
    • 혼잣말:
      보스가 지금 한 사원에게 엄청 화를 내고 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다른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저런 식으로 분노를 즉각 터트리지 않는 사람이라 놀라는 중이다.  어리둥절해서 레아나에게 알아보노라니 내가 보스에게 감정이 끓어오르는 상태. - -
      버뜨~ 내가 직접 확인한 사안이 아니라 보스에게 확 대들까봐 자제하며 평일 낮시간엔 하지 않는 인터넷질을 하고 있음. 

      그 사원의 이력과 내력을 잘 아는 보스가 저렇게까지 화내는 이유가 이해 안 된다. 웬만한 잘못은 이해할 관계인데 그것참.
      보스도 조직 안에서는 하나의 개인이다. 책임이 가장 큰 지위라 해도 자기의 개인적 판단으로 상대를 저렇게까지 제압하려는 사람이 나는 이해 안 된다. 이론으로 포장하며 고상떠는 것보다는 나은 걸까?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저런 모습은 전깃줄에 발이 걸린 참새 같다. 

      시끄러운 소리엔 그냥 문을 닫고 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썩은 종기는 도려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어이 들이받는 사람도 있다. 내 성깔이 기어코 그럴까봐 인터넷질 중. -_-
      • 별장 빌려준 보스인데 들이받기 쉽잖겠네요...썩은 종기 음, 고름이 피되나? 파이팅! 들이받으셨길!
        팔대산인이 실존인물이더군요. ㅎ
        • 어제는 꿀꺽 참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훗날 우리가 평온한 감정상태일 때 제 의견을 말해보긴 할 거예요. ㅎ




          팔대산인은 명청 교체기에 활동한 왕족 출신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이 지나치게 사회적 해석을 담고 있다는 평이 있으나,  불운했던 천재라는 대접이 일반적이죠. 그가 시대를 잃어버린 분노를 그림 속에 투영했다는 해석에 저는 반만 동의해요.


          그의 그림 선을 참 좋아하는데요, 특히 <쏘가리>시리즈와 <새우>는 그의 맑은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해서 모작해본 적도 있어요. 




    • 아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요 그사람.


      난 한시간 뒤에서 사는데 한시간 반 앞도 본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저 뒤로 가는 것이다 평온한 안도의 말이네요.

      • 느림의 미학도 인생의 선택지 중 하나죠. 속도에 대한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고, 중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속도를 선택하는 것이지 빠름이 아닌 거죠. 
        (근데 가영님이 왜 미앙?)

    • 어디로갈까 님의 닉네임의 유래가 바로 그 새에 대한 글이었던 걸까 생각드네요. 어디로갈까. 사실은 그냥 어디 있었는지 알고 싶을 뿐.


      팔대선인...동생분과의 대화로 봐선 너무나 난 분이었네요. 먼저 가셨다니 참...

      • 음. 그냥 어릴 때부터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런 의문을 가졌어요. '꼭 어디로 가야 하나? 계속 교차로에 서 있으면 안 되나?' 
        언젠가부터인지  '뭐, 난 어디로든 갈 수 있지. 어디로 가도 좋아~' 라는 배짱이 생겨서 붙인 닉네임. ㅋ 

        그 친구 떠난 후 처음 울어본 게 우연히 윤도현의 <너를 보내고>를 듣던 순간이었어요. (그후 지금까지 윤밴 노래는 안 들음. - -)
        "... 먼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내게 시간은 그만 놓아주라는데,  난 왜 너 닮은 목소리마저 가슴에 품고도 같이 가자 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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