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현타, 그리고 그 극복

정치인들에게는 각자의 대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의를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죠. 이걸 추구하는 과정은 험난한 일 입니다. 뻘에 구르는 일이고, 자신을 대의-권력 기계로 만드는 일 입니다.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일이죠.

이 치열한 자기소모의 과정 속에서 현타가 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 입니다. 열심일수록 더 현타가 오기 쉽죠. 그만큼 갈등과 부조리에 더 노출될터이고 자기를 더 소모할테니까요.

이 현타가 왔을 때, 대처하는 첫번째 방법은 받아드리고 포기하는 겁니다. 표창원이 그런 케이스죠. 그가 지역구 관리를 포기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죠. 자존감 강한 성격에 지역구 행사마다 돌아다니며 굽신거리는 것, 그럴 때 오는 현타를 못 견딘거죠. 유시민이 직업 정치를 결국 포기한 것도 마찬가지고요.

두번째 방법은 현타가 온 상황에서 의미를 되찾을 공간을 만드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미국 정치(주로 공화당이지만 민주당 역시)에서 가족의 역할입니다. 미국 정치인들에게 가족은 가치의 중심이죠. 그렇게 성별화 된 곳에서 현타를 극복할 의미-자원을 동원하는거죠. 덕분에 가족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커리어를 희생하는 제스처가 미국에서는 탁월한 정치적 전술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유럽식의 공과 사의 분리입니다. 니가 공적으로 역할을 하면 사적으로 뭔 짓을 해서 현타를 극복해도 상관 안 한다는 태도죠. 물론 위법은 아닌 수단으로요. 그래서 정치인들이 사적으로 연애를 하든 바람을 피든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현타를 극복할 마땅한 수단이 없을 때 입니다. 이럴 때 최악의 경우, 자기연민의 판타지에 빠져들죠. 대의를 위해 희생한 결과 공허해진 나 자신이라는 판타지요. 그리고 그런 나를 체워줄 상대를 찾죠. 그리고 그 상대는 가까이에 있는 을이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감춰야 할 공허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상대여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상대에게 연애-판타지를 만들어 갑니다. 안희정이 교과서적 사례죠. 상대가 을의 포지션이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게 이 판타지 속에서는 소극적 동의로 이해 됩니다. 대의에 헌신하는 나 / 그 과정에서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너 라는 환상이 굴러가는거죠.

한국 정치의 문제라면, 정치인들이 이런 현타를 극복할 마땅한 기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겠죠. 물론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모두 자기 연민의 판타지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다 나름의 임시 자구책을 만들겠죠. 그 중에서 최악의 답을 찾은 건 자신의 책임이고요.

개인적으로 노무현은 현타 자체를 재출발의 애너지로 삼았던 인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점점 더 큰 순환을 그리다가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선택을 한 것이고요.

반면, 문재인은 어쨌거나 그것이 인격이든, 종교든, 부채의식이든 뭐가 되었든 간에 현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정치를 안 하려고 했으니까요),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를 하고 있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 것이고요. 그게 정치인 문재인의 최대 무기이기도 하죠.

아, 그리고 저 일반적인 정치인들이 구성하는 임시 자구책은 대부분 가족(마국)-사생활(유럽)의 불풍분한 혼합물이 아닐까 싶어요. 공과 사를 분리하긴 하는데, 여기서 사란 대부분 가족-재생산이죠. 그래서 그토록 위장전입, 부동산, 학력세습이 빈번한 것이고.

더해서 미통당의 경우, 정치인이 얼마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이니 애초에 여긴 현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 힐러리 클린턴이 미드 <굿 와이프>를 좋아했다는 이메일 유출 내용이 생각하네요.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 속은 얼마나 부글부글거렸을까요
    • 재미있는 가정인데... 현타라는 말 자체가 그닥 공감 안됩니다. 정치인으로 살면서 쌓이는 독이나 자만이나 오만이라면 모르겠는데... 펜스 부통령같은 겸허함이 있었으면 이런 비극은... 필요할 때 진짜로 현자가 될 수 있게 텐가같은걸 소지하는게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이런 최후는 없었을지도.

      • 현타='내가 이 짓을 계속 해야하나?' 이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 현타는 정치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와요. 회사다니는 사람들, 학생들, 주부들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시시각각찾아오죠.정치인현타 걱정할때가 아님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8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0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8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4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