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모 카페에서

미팅이 있어서 대학로 모 카페에 와 있습니다. 근데 상대방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 시간 늦겠다며 죄송하다는 전화통고를 해왔어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카페엔 손님이 저 포함 두 명뿐이에요. 마치 루이 14세 시절의 궁정 연회에나 쓸 법한 의자들이 죽 놓여 있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중 2악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 해결해야 할 문건들을 살펴보려다가 노트북을 꺼내놓고 이렇게 듀게에 희롱질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앞 자리의 손님이 애머 액젤의 <무한의 신비>를 읽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에요. 
수학자들을 중심으로 카발라와 집합론을 섞은 기묘한 타입의 내용인 저 책을 읽는 사람을  한 십여 년만에 보네요. 저 책이 이상의 무한육면각체라든가 삼차각 설계도와 접속하는 모종의 키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기대없이는 보통 안 읽을 책이라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퍼집니다.
아직 20대로 보이는데, 아마 생각만큼 독서 속도가 나지는 않을 거예요. 용서(이용하는 책)가 아니라 독서(살피는 책)'의 대상인 책이거든요. 

19세기 유럽 카페의 역사를 접하노라면  카페에 모여 노닥거리며 생각과 열정을 나눠서 자신의 글/그림을 향상시킨 작가들이 많았죠.  '카페'라는 우선멈춤 하는 간이역에서 만난 낯선 상대에겐  좀더 신선/특별한 시선으로 집중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튼 제가 저 청년보다 먼저 이 카페를 나가게 되면 그의 음료+케익 값을 지불하고 나가려고요. 에머 엑젤을 읽는 정도면 살면서 요런 횡재(?)도 한번 맛봐야 하는 거죠. 이 집 가격이 이 동네에서  많이 비싼 편이라는 걸 확인해서 더 그렇습니다.  -_-
    • 호오, 후불제 가게인가요

      • 맛만큼 이미지를 주요 콘텐츠로 하는 카페들은 후불 시스템을 고수한답니다.
    • 그 청년 학교 과제 하다가 횡재(?)하는 건 지도 모르겠네, ㅎㅎ


      만약 하면 왜 했다고 생각할까? 


      • 수학과에서 추천도서로 회자될 수는 있겠으나 과제로 쓸 책은 아니에요. ㅎ

    • 뭔가 옛날스럽게 낭만적이고 좋네요. 


      덕택에 이상의 시도 오랜만에 다시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여전히 뭔소린진 모르겠지만(...)

      • 유럽에선 19세기, 한국에선 20세기까지만 위세를 떨치다가 사멸해버렸다는 낭만.
        제가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며 구현하고 있는 건가요? ㅋ

    • 나올 때 카운터에 이유를 말해줘야 할텐데 용한 저청년이 절대 모를 일을 만들어주니' 책동지라고 하는게 좋을거 같네요
      • 제가 대납했어요. 얏호~  메모를 남겼죠. 

      • 제  행위가 낭만인 거라면 정처 없는 일상에서 새로운 파란 가스등 역할을 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 요즘처럼 삭막한 현실에서는 하나의 레퍼런스 구실을 했을 수도 있.... - -

    • 무한의 신비도 그렇지만 카페에 혼자 앉아 케익먹고 있는 남자는 엥간해서 보기 힘든 광경이네요.
      • 요즘 카페의 성격은 둘로 갈려요.  단순하게 커피와 디저트를 파는 곳과 여가를 소비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


        후자의 역할을 하는 카페엔 혼자 와서 음료와 다양한 다과로 식사해결하는 청춘들이 많습니다.


    • 두 시간 가량 그 카페에 머물렀는데, 청년이 저보다 궁디가 무거웠던지라 제가 대납할 수 있었습니다.


      알바생에게 쉿~ 을 부탁하고 메모를 남겼어요. 


      'For Infinity, For 알레프 (이 단어를 헤브라이어로 표기했는데 이 게시판에서는 ?으로만 나타나서 모양새 빠지게 한글임. ㅎ)'


      • 용한 사람이 용한 사람을 만난 경우인데 아마 평생 기억에 남아있을걸요 프로즌 올라프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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