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인 화투판을 치우며

우리집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에 화투판이 벌어집니다. 어제도 늦은 오후부터 판이 열렸는데, 보통 서너 시간이면 마감되던 장이 웬일로 새벽까지 이어졌던가 봅니다. (아마 아버지가 엄청 큰 돈 잃으셨던 걸로 추정됨. - -)
저녁까지 간식 시중들다가 잠들었는데, 좀전에 일어나보니 아무도 뒷마무리 안 한 난장판 노름 현장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저를 맞이하네요. (한숨)

화투는 일본의 '하나후다'에서 유래한 놀이라죠. 그래서인지 12가지 그림들이 다 일본스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노도후라는 인물을 표현했다는 '비광'의  우산을 쓴 빨간옷의 남자와 개구리가 그려진 그림이 저는 제일 거슬리더라고요. 2월에 해당되는 앵두와 참새 그림은 그나마 쫌 예뻐 보이지만요. 저는 그림조각을 맞추는 민화투만 가능할 뿐 고스톱부터 '섰다'니 '도리짓고땡' 이니하는 전문 분야는 전혀 모르는 화투 문외한입니다. 판이 벌어지면 간식 심부름이나 해요.

아무튼 중딩 때,  '비광'의 그림/색채를 보며 질색을 했더니 할아버지가 설명해주셨어요. 그는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고 교훈적인 일화가 있다고요. 
뛰어난 서예 능력을 지닌 오노도후가 서예를 더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아 사사를 받던 중,  인정을 받지 못해 고민에 사로잡혔다죠. 별 생각을 다 하던 중 비오는 날 길을 나섰다가 우연히 개구리 한 마리가 물 위로 난 돌 위에서 물난리를 피하려고 있던 모습을 봤대요.
그는 이 개구리 -  물에 떠내려 가느냐 아니면 위에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 위로 뛰어올라 자신을 구하느냐로 사투를 벌이는 모습- 을 곰곰 지켜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개구리에 투영했다고 합니다. "넌 못할거야!"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버드나무 가지가 순간 아래로 처졌고 개구리는 그 순간을 안 놓치고 폴짝 뛰어올라 가지 끝을 잡고 나무 위로 올라갔대요.  그 순간 오노도후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서예에 더욱 집중하여 마침내 스승과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더군요. (먼산)
이 일화를 바탕으로 철학자- 시인인 서동욱이 쓴 시가 있으니 바로 <비광>입니다. 

- 비광 또는 李賀의 마지막 날들 / 서동욱
     장안에 한 젊은이 있으니
     나이 스물에 이미 마음은 늙었네 - 이하李賀   
       
1   
아 이토록 슬픈 그림이 또 어디 있으랴 찢어진 우산 위로 비는 내리고,
개구리 덤벼드는 실개천에 그는 붉은 목욕 가운을 걸치고 서 있구나
미친 척 하려고 아바지 중절모까지 빌려 쓰고 나왔구나 닭! 학! 사쿠라!
보름달! 이 고귀한 왕자들 가운데 빛도 안나는 비光, 돈 못 버는 왕좌의
군주이기에 더 슬프구나 그리하여 무직(無職)이므로 해서 그대의 정체는
일단 시인이구나

2
흔히 '미친님'이라 불리는 이 비오는 그림 속의 배우. 이 자보다 더 잘
이하를 연기한 사람이 있을 것인가? 이 배우를 연기한 나는 햄릿이었다
그리고 하남성으로 잠입해 들어가 폐병쟁이 이하가 되었다 나는 이하가
나귀 타고 지나가던 무성한 갈대밭이었다 갈대처럼 황제의 귀에 소근거리던
내시였으며 이하를 모략한 관리였으며 그 관리의 아버지 하나님 헌법(憲法)
이었으며, 이하를 몰래 사랑한 계집종이었다 아예 나는 이하가 살던
당나라의 국민.주권.영토이자, 이하가 시를 담아두던 비단 주머니였고
그가 드나들던 기방의 댓돌이었으며 아아 이 우주가, 이 모든 실패가
나였으며.....

3
시예술을 숭상한 나라와
봉건제국이 하나였으며
시인과 관리가 하나였으며
관리와 부자가 하나였으며
시를 쓴 족자와 사치품이 하나였으며

이 모든 것을 탐냈으나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원하지 않는 순교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으며
나는 우리 국가가 부끄러워한 시인이었으며
국가가 부끄러워 하니까 우리 집안도
여편네도 나를 부끄러워하였으며
그러므로 나는 후세에 별(星) 모양의 수수께끼가 될 것이나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었으며
지금은 백치와도 같은 분노만 끓어오르는
열(熱) 덩어리였으며

4
마음은 장님의 눈처럼 안도 바깥도 없는 헐렁한 검은 구멍일 뿐,
그 안엔 애써 간직할 추억도 숨기고 지킬 비밀도 없네 마음이 열려
버린 자는 꼭 다물었던 항문이 열려버린 익사체 더 이상 바다를 막을
힘도 없이 원시의 세포막이 최후로 찢어보며 몸 안 가득 물이 찬다--
향년 27세. 이름:이하. 과거를 보러갔다가 햄릿처럼 아버지의 유령이
출현하는 바람에 신세를 망침.

5
그리하여 어느 날 청춘의 불을 꺼준 시간의 단비에 대해서 감사할
것이다 살아야 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아서 고마울 것이다 처녀에게
애를 배게 하던 못된 비바람이 더 이상 내 성기 속에 살고 있지 않아서
이젠 편안할 것이다.......




    • 음. 혹시나 하고 쇼핑몰에서 검색해 봤더니 화투매트라는 걸 팔고 있더군요.


      우리집 화투바닥은 어머니가 낡은 이불 잘라서 신문지를 심지로 넣어 바느질한 거라서 손댈 때마다 소리가 나는 거거든요.


      한가위 선물도 안 한 터라 까짓것 8500원 시원하게 질렀습니다. 아무튼 한국 산업 계는 참 놀라운 부분이 많아요. ㅋㅎ



      • 50년은 넘은 듯한 군용 담요를 아직 못 버리는 이유입니다. 

        • 화투를 내려칠 때 손맛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그 환상의 군용담요를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50년 된 거면 백퍼 아크릴사겠네요. 요즘은 폴리에스터를 사용한다더군요.
    • 예전에 어느 출판사 책인지 집에 있던 당시선(唐詩選)을 훑어봤었는데,


      이하를 이백, 두보 다음으로 높게 평가해 놨더라고요.


      한혈천년토중벽(恨血千年土中碧)이란 시구를 이 사람이 쓴 거구나 했지요... 무협지에 많이 나오거든요. ^^


      ...


      오타신고--->오도노후


      • 할아버지 옆에서 먹 갈아드리던 시절에 따라 써봤던 이하의 시가 있어요. 제목에서 심쿵했던 기억이... 




        - 莫種樹 나무를 심지 말자 / 이하


        園中莫種樹  뜰에 나무를 심지 말자


        種樹四時愁 나무를 심으면 사시사철 근심하게 되느니


        獨睡南床月 홀로 잠들면 남쪽 침상으로 스며드는 달


        今秋似去秋 올 가을이나 지난 가을이나 한결 같다




        ---- 


        오노도후라고 바른 표기했는데? 라고 보니 (먼산) 보기 전에 오타냈군요. 고쳤습니다. 정독하시는구나... 힛죽~ 

    • 목단 홍싸리 공산 국진 풍 똥 비는 다음에 아까 제목을 난장판 최루탄을 치우며로 봤어요
      • 폰 접속하시니 그런 거예요. ㅎ

    • 화투 쳐본지 오조오억년 된 거 같습니다. 얼마전에 지인께서 고양이 화투를 선물해 주셨어요. 냥투라고 하는데.. 귀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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