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책상

(저 아래 글에서 singlefacer님 댓글을 받고, 그에 관해 쓴 글 중, 어머니가 보관해둔 중딩 때 글이 있을 테니 올려보겠다 했는데, 그 글은 없다시더군요.
대신 이 글을 보내주셨어요. 졸업 후 밀라노 근무 시절에 쓴 글인 듯합니다. 자신의 옛글을 읽는다는 건 참 간질 오글거리는 일이지만, 대견한 마음이 드는 걸 숨기지 않고 공개해보아요~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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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보내 주신 [칼의 노래]를 사흘에 걸쳐 읽었다. 이 책에서 내가 찾은 미덕은 김훈이 인류의 역사에 전쟁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한국 소설 중 참호에서 쓰여진 작품은 드물다. 전쟁을 소재로 했더라도, 소설이야말로 평화를 즐기는 소일거리에 불과함을 드러낸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화약연기도 나지 않았고, 칼로 베어진 흔적도 없었다.
김훈은 다르다. 산다는 것은 편하게 죽는 자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참호의 생애를 말한다. 죽고 싶은 곳에서 죽을 수 있는 자는 행복한 인간이라고.

'칼의 노래'는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 여행] 같은 산문들에서 보여지는 남성성보다 더욱 더 완정한 형태의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훈은 죽음을 빙자해서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 사유하고, 죽음 앞에서 침묵한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맞서기. 이것이 그의 신념이며, 이 신념이 그의 문학에 엄청난 박력을 부여하는 듯싶다.
그는 죽음을 기가 흩어져 흙으로, 불로, 물로,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 아닌 초월적 힘이 나를 데리고 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김훈은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인간이다.

'칼의 노래'에 가득한 선연한 절망의 냄새는 매우 매혹적이고 감염력이 탁월하다. 지금은 이른바 가볍고 쿨한 세상이며, IMF의 책임 한쪽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의 쾌락주의가 만연한 세상이다. 김훈은 그런 세상을 향해 칼과 죽음이라는 오브제로 한번 베어지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늠하여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다.
시대와 불화했던 만큼이나 그는 성실하다. 그의 문장은 성실하며 관용적이며 동시에 독창적이다. 접속사 하나 없는 그의 문장은 '세계의 계면을 드러낸다.' 스스로 말했듯이, 우원한 세계의 모습이 그의 문장의 도도한 흐름을 통해 현현하는 셈이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썼지만 그는 아마도 '붓의 노래'는 쓰지 않을 것이다. 붓은 칼과 현을 노래하기 위해서만 쓰여지는 것이지,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해 쓰여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 된 세상을 경멸하면서도 글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 단단한 작가에게서 내가 맡는 것은 죽음에 대한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그의 죽음관은 삶의 유한성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여느 인간의 현존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그 '어떻게' 앞에다 '주어진 세상에서'를 첨가할 뿐이다.

보편적이지 않은 세상, 단 한번도 평화롭지 않은 세상에서 그는 이미 쇠약해진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공작하고 사유하고 쓰고 있다. (이가 솟구쳐서 이빨을 손으로 하나씩 뽑아내며 '칼의 노래'를 썼다지 않은가.) 
온 몸으로 밀고가는 아날로그 방식의 글쓰기로 그는 몇 편의 작품이나 더 내놓을 수 있을까.
어느 대담에서 스스로 예견하긴 했다. 탐침해보고 싶은 세계가 두,셋 정도 있을 뿐이라고. 더 있다고 해도 자신의 물리적 나이가 허용하지 않을 거라고.
세상의 밑바닥에 마음을 대고 그 긴장을 이겨내며 사는 그는 어느 청년보다도 젊다. 그가 부디 안녕하여, 말 아닌 것들을 베어 말의 순결성에 이른 칼 같은 말로, 다시 한번 내 가슴을 그어주기를 기원한다.



    • 근데 왜 체목을 김훈의 책상이라고 했을까요? 저도 모르겠...  -- 

    •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건 자기 생각을 쓰는거죠. 무슨 사상, 이념, 주의 이런 저런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게 아니라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적는 거 이게 가장 기본인거죠. 김훈의 칼의노래는 잡스런 미사여구를 모조리 베어 없애버렸죠. 첫 문장 '버려진 산마다 꽃은 피었다'를 담배 한갑 다 피우고 나서 '꽃이 피었다'로 수정했다고 하죠. 김훈의 진가는 여기서 나오는 것.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
      • 그러게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의 첫 문장에서 조사 '은'과 '이'의 뉘앙스 차이를 두고 그렇게 고심했다죠. 저도 중딩 때 온라인에 글 쓸 때는 조사 하나에도 곰곰/ 연연했으나, 지금은 뭐 떠오른는 대로 막 씁니다. 그래서 작가 안 되고 일개 네티즌으로 게시판이나 어지럽히는 재미로 살고 있는 거겠지만.ㅎ
    • 어디로갈까 님의 옛날 글은 아주 이해가 쏙쏙 되네요. ^^ 글의 내용에 동의합니다. 


      비평의 대상을 좋아하고 높게 평가하면 비평문도 그 대상의 문체를 닮게 되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어요. 


      평소의 어디로갈까 님의 문체와는 다른, 어쩐지 김훈적인 문체의 글이었어요.  

      • 그렇죠? 저도 다시 읽어보며 어라~ 이건 완전 김훈 풍이네 했어요. 잘 쓴 글은 확실히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ㅎ

    • 대단한 겁니다, 자신의 옛 글을 다시 펼칠 수 있다는 건

      • 좀만 뻔뻔해지면 자기 과거사 정도는 덤덤하게 공개할 수 있게 돼요. 험험

    • 저, 글을 읽고 싶은 바람에 위의 괄호 안을 안 읽고 읽다가 매우 놀래면서 읽었습니다. 하마터면 댓글도 달 번 했네요. 잘 읽었습니다. 안 읽는 작가인데, 그런가? 하며 읽어보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 칼의 노래는 함 읽어보셔도 시간 아깝지 않을 글이에요. 저는 김훈의 모든 글을 다 읽었는데 이 소설이 가장 좋았어요.

    • '칼의 노래' 처음 읽었을 때는 문장의 간결함과 비장함이 내용과 딱 떨어지면서 인상적이었는데 지금 생각은 문장에 너무 멋을 부린달까, 힘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전거 여행'은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문장이 좀 예스럽죠.


      7-8년 전에 극장 지하 주차장에서 차 기다리다 본 적 있어요. 보고 있으니 작가도 쳐다보길래 '독자입니다'하고 인사했더니 좋아하시더군요. 그때 영화는 '레 미제라블'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 이 소감도 이해됩니다. 울 언니가 김훈을 처음 읽고 나서 말한 독후감이 이랬어요. 독일어로 'schwanger 임신한 - 즉 생각을 품고 다니는' 작가인 건 알겠다고. 그렇게 독자의 감정을 점점 부풀어 오르게 하는 능력이 있는 건 알겠다고.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고. ㅋ


        직접 보셨다면 심쿵했을 듯. 어릴 때 대면했던 그 화등잔만한 눈과 눈빛이 제겐 여태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어요.

    • 지금 봐도 마음에 드는 게 있긴 해요 당연하죠 짧은 동안인데 뭐 얼마나 아니 길어도 마찬가지죠 내가 어디 가겠어요, 마초 삼국지 마초도 되고 뿌리가 깊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마초는 깊은 남성성을 말하죠 여포는 고우영 작가 때문에 좋아졌어요
      • 음. 이런 작가는 파스칼의 <팡세>나 노발리스의 프라그멘트 전집 읽듯 판단의 편집 없이 읽으며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
        느낌을 마치 프리즘에 나뉜 빛이라도 되는 양 세분 할 이유 있을까요. 종합하려 들지 않을 자세도 독자에겐 필요하죠.
        • 에고, 왜 이런 글을 남겼을까요. 멋부릴 작정은 아니었는데 멋이 폭발하는 문장이네요. 민망하지만 안 지우겠음요~ ㅋㅎ

          • 또 달래는데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내면의 근접은 땅짚고 헤엄치기라,난 전에 조카한테 막 지어서 얘기 해주는 어법 밖에 모르는데 어디님은 잘도 들어주지
    • 제가 왜 제목을 <김훈의 책상>으로 했을까요? 라고 어머니께 질문했더니


      이 글 올리면서 김훈이 책상으로 쓰는 소반 사진을 맨 위에다 떡 붙였다는군요.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글 쓰시는 걸로 유명하죠.)


      궁금했는데, 아 개운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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