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을 기억함

- 아버지도 듀게 눈팅하시나봐요. 대딩 때 쓴 이 글을 오전에 보내주셨어요. 저는 기억에도 없는 글인데 읽노라니 뭔가 뭉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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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인사동 '평화만들기'는 한 시절 문학동네의 사랑방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가봤던 이십년 전에는 아직 문단의 외로운 섬인 신인작가들에서부터 이미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있는 기성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듯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마주치고 확인되고 나누어지던 장소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들의 파격, 그들의 나르시시즘, 그들의 허장성세, 그들의 자괴감, 그들의 후안무치...... 를  그곳에서 절감했고 멀미까지 느꼈던 것 같다.


유럽을 떠돌며 살다가 한국으로 잠시 돌아온 아버지(와 나에게) 친구분이 그곳에서 첫 환영주를 샀다. 그 자신이 문화부 기자였으므로 그곳이 그의 신문사 밖 거처였다. 추억을 포개며 드나들만한 장소들이 사라지고 없었던 탓에 아버지도 금방 그곳에 정을 붙이고 날 데리고 다니셨다.


까페 주인은 막 등단한, 작가로서의 폐활량이 달랑 단편집 한 권인 Y였는데  어린 내 눈에도 자긍심과 친화력이 똑같이 큰 사람이었다. 그곳에 온 가장 어린 손님이어서였는지  나에게 특별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저녁,  아버지가 일 보시는 동안 아이 특유의 자세대로 바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카운터 안쪽에 연결된 주방 쪽문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세수라도 하고 나온 것인지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구조 탓에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코 앞에 있게 되었다. 눈이 굉장히 큰데다, 이쪽의 이마가 저절로 숙여지도록 공격적인 눈빛이었다.

"아가, 나는 맥주를 소금하고 마신다. 것도 이렇게 손등에 올려놓고 혀로 살짝 찍어서. 멋있지?"

        

한 자리 건너 옆에 앉아 있던 혼불의 최명희 작가님이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제어하셨다. 그러자 그가 내게 목례를 보냈는데, 실은 인사도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먹 하나를 내 앞으로 내밀며 그 손등에다 소금을 올려 놓았다. (아이에게 다음 잔의 안주로 쓰라는 의미였을까. ㅋ)


그의 비상한 글도, 글만큼 특별하던 성질도, 사표를 반복하던 고집도, 고집 속에 있던 결벽도 내가 전혀 모르던 때였다.

그가 운전을 못하는 희귀한 기자라는 것. 최명희를 국보처럼 아낀다는 것. 천상병에게 가지지 않아도 좋을 이상한 부채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 컴퓨터도 타자기도 만년필도 아닌 연필로만 글을 쓴다는 것. 연애하듯 마음을 기울여 단어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 가부장제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 견딘다는 이디엄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 등등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내 직업이 그의 직업과 가까이 닿아 있었던 몇년 동안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책이나 잡지를 통해 멀리서 김훈을 본다. 특별히 마음에 인각된 사람이 아니므로 객관적인 관심 정도이다. 그런데도 그가 곤경에 처하면 신경이 쓰이고, 세간의 비난을 스스로 버는 어떤 위악엔 마음이 아프다.

어제 십 년만에 한 케이블 방송 대담 프로에서 우연히 그를 긴 시간 지켜볼 수 있었다. 변한 모습은, 세월이 내려앉은 흰 머리와 깊어진 주름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속없이 부러워할 수 없는 느낌의 따뜻함이 있었다. 상처를 입을수록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그런 사람인 듯싶다.


어린아이처럼 어눌해진 발음으로 그러나 거침없이 정직하게 그는 인터뷰어의 질문들에 답했다. 무너짐이 오히려 정당한 시대가 있다고. 시대가 무너졌는데 어떻게 개인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추상화된 언어, 정치적인 언어의 뻔뻔함을 증오한다고.구체적인 언어로 살겠노라고. 나에게 소중한 건 보편성이나 원리가 아니라 나의 편견과 오류들이라고. 나의 편애를 유지하며 살겠노라고.

그리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겠지만) 집 안에서 여생의 시간을 혼자 살겠노라고. 혼자의 삶처럼 건강하고 건전하고 발랄하고 힘찬 삶이 없다는 확신 때문이라고.


그의 호를 어제 처음 알았다. 아름답고 쓸쓸한 의미였다.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 <춘수>.


    • 나도 김훈 같이 눈이 예쁘게 아닌 좀 무섭게 똥그란 사람한테 약간 겁을 먹기도.


      맥주에 소금을 주먹에 놓고 영락없는 웨스턴 폼인데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수 있죠.


      짦은 글이지만 잘 썼네요, 아가


      • 아가라니욧~ 


        날짜가 없어서 대딩 무렵 쓴 글인 줄 알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졸업 후, 첫 직장 6개월 다니다가 지금 회사에 스카웃당해 업무에 허덕이던 무렵 쓴 글인가 봅니다. 제가 이 시절, 밥 버는 게 좋은 일인 줄 모르고 마냥 억울해 하면서 일 보다 가족 홈페이지에다 글쓰기에 집중했더랍니다.ㅋ

    • 세번쯤 읽고, 잘 기억나지 않는 아이디와 비번을 실수 끝에 찾아 댓글을 달아요. 앞으로도 몇번을 더 찾아와 읽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문장들이 그리워서요.


      '그의 얼굴에는 속없이 부러워할 수 없는 느낌의 따뜻함이 있었다. 상처를 입을수록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그런 사람인 듯 싶다.'
      • 모니터 너머로나마 우리 악수 함 나눠요. 반갑습니다.


        기억도 안 나는 비번으로 접속하셨다니 제대로 진_ 님 취향 저격한 글인가 봅니다. 셀프 쓰담쓰담해요. 

    • Y로 표기한 '평화만들기' 소설가 주인장이 누굴까, 궁금해서 구글링해봤습니다. 유정룡 님이네요. 이름이 더 이상 안 알려진 걸로 보건대 단편집 하나로 작가생활은 마감하셨나 봅니다. - -

    • 최근에 말나오는 소설은 좀 난해해서 읽다말았어요.


      칼의노래 남한산성 좋았는데요

      •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읽다가 포기하셨나봐요. 저는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 다 읽었습니다. 


        그가 이런 종류의 환상문학을 쓸 거라는 예상을 안 해봐서 저도 좀 당황했어요.


        의외로 위트와 위엄이 있는 글이었고요, 우리가 '마구간의 말'처럼 사는 모습을 잘 그려냈어요. 


        다만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 사는 우리 사회를 너무 노골적으로 고발한 느낌이라 그건 살큼 촌스러웠습니다. ㅎ



    • 좀전 머저리 군과 까똑하다가 물어봤어요. 니들은 (남동생1 포함) 왜 연애도 안하냐?


      막내가 진지하게 말하기를, 여자는 모두 누나들처럼 기세고 똑똑할 것 같아서 형과 나는 연애 못함. 아마 결혼도 안할 확률인 98%임. 


      뭔가 미안하고, 걱정되고, 우스꽝스런 항변이네요. 뭐 형제 대표로 언니가 결혼했음 됐죠. 삼남매가 비혼자로 옹기종기 서로 구차스럽게 나이들어가며 사는 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 제 딸이 예전에 다시태어나도 엄마랑 결혼할거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했죠. 아마 저의 이 말이 이 친구한테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다음 생엔 자신의 존재근거가 없어지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니 여린 마음에 아빠에게 굉장히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축구경기에서 1+1=0 이 발생하곤 하죠. 수비수 2명, 상대 공격수 1명일때 상대공격수가 공을 치고들어오는데 수비수 둘이 서로 양보하다가 뚫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엄마아빠가 모두 바깥일을 하면 이 1+1=0이 되는 경우를 무수히 경험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나가서 돈을 벌면 한 사람은 집에 남아서 뒷치닥거리를 해줘야 합니다. 나가서 돈 버는 사람은 축구로 치면 공격수인데 골을 넣는 화려한 플레이로 일반적으로 시장가치가 높죠. 반면 뒷치닥거리하는 주부는 축구로치면 수비수로서 주로 재능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배치됐습니다(순전히 저 어릴적 축구부 경험임). 허나 수비가 견고하지 않으면 공격이 제대로 될 수가 없죠. 수비수의 가치가 많이 평가절하 되어 있는거죠. 그래서 제대로 된 감독이라면 축구든 야구든 기타 공격과 수비가 있는 모든 종목은 먼저 수비를 안정화시키고 공격진을 보강합니다. 이게 기본이기 때문이죠. 현재 우리 사회 가족 형태는 이 기본이 흔들리고 있어 좀 안타깝습니다.
        • 하하. 실제로 이렇게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신박한 해석이라서요.


          두어 번 댓글 다신 걸로 봐서 따님이 저와 비슷한 성향인 것 같아요. 따님과의 사이에서 난감한 문제에 접하면 본문으로든 댓글로든 질문해주세요. 비슷한 성향끼리는 암호로 통하는 로드가 있거든요. 




          저는 가장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제 부모님에게서 봤고, 이걸 지켜본 거면 됐다~ 싶어서 결혼에 대한 기대나 환상은 1도 안 갖게 됐어요.


          고딩 때, 아버지 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오는데 그러시더군요. "난 니 엄마가 누나 같다. 이렇게 위안이 되고 포근한 존재는 내 인생에서 유일하다. 넌 비혼자로 살겠다니 응원한다. 나처럼 잘난 남자도 이런데 니가 나 보다 잘난 남자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 없다고 본다." 


          아니, 이게 아버지가 딸에게 할 말인가요? ㅋㅋ

          • 아 어디로님 아부지 대단하게 멋있는 분이세요 가설에 두배 진실을 더한 애정이 넘치는 말로 미혼으로 살겠다는 딸을 응원해주시는
            • 아부지 멋있는 건 모르겠고, 따뜻한 분이긴 합니다. 엄혹한 시절 감방에 끌려가실 때는 위풍당당하셨는데, 두 딸 앞에서는 엄청 소심해지십니다. 어느 주제를 놓고 가족끼리 논쟁할 때 제가 별 생각없이 3분만 아버지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위축돼 시선을 슥 피하십니다. 제가 왜 날 세상에 불러내셨지? 골질하다가도 그런 표정을 대하면 원망이 스르륵 풀려요.

              • 그럼 자꾸 오래 쳐다보는데 눈싸움 할수 없죠 누구는 내가 그러고 싶어 그랬냐 한다고
          • 억 뭔가 반전에 반전이.. 소름돋습니다.

            • 반전이 어느 부분이었을까요? 갸우뚱~ 

              • 특별한 반전이에요 누나 잘남 말리지 않음
    • 모티프는 자유롭고 기쁘다는 의미의 Frei aber froh라는 단어가 있어요. 줄여서 FAF라는 암호로 사용해요. 
      음악에서는 바흐와 슈만이 이 철자로 만든 곡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 먹다가 동료들과 오늘 점심에 바흐를 들으며 김치찌개를 먹었답니다. 술술 넘어가서 아니 이게 뭐지? 놀랐어요 
      근처 할무이 식당에서 1년 넘은 묵은지로 끓여낸 김치찌개였어요. 

      • 숙취에 오래 굶고나면 입맛이 돌죠 난 일주일 거의 물만 마신적도
    • 우주대스타인 사촌동생 소속사에서 반 년 전 제게 스카웃 제의를 했어요.


      제 연봉을 알 텐데 삼분의 일로 후려친 가격을 제시하면서요. ㅎ


      돈은 그러려니 하는데 그 분야를 전혀 모르는지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좀전에 방 대표가 다시 같이 일해보자는 문자를 보내왔어요.


      제가  그렇게 유능해보인다는 게 신기방기합니다. -_- 

      • 저런 제의를 받을 때마다 사는 게 슬프다는 감정이 드는 건 어인 이유일까요. 쓸데없이 눈물이 콕~

        • 2/3를 후려쳤다면 냉정하게 말해서 스카웃이 아니고 와서 일배우고 싶으면 와 라는 뜻이에요. 방대표가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답게 하는듯. 그리고 위에 아버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마 많은 딸가진 아빠의 심정이지 않을까 하네요. 모든 남편들이 내 아빠만큼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죠. 저도 그래서 한편으론 딸아이의 비혼을 반대하지 못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딸들이 비혼선언을 하도록 만드는 이 사회가 뭔가 잘 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거죠. 마치 모두가 공격수만 하려고 하는 축구팀을 보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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