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미덕

잊는 것도 일종의 재능입니다. 오전 내내 전화로 친구의 하소연을 듣노라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요. 뛰어난 망각의 끝은 신성성에 가닿는 거니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긴 합니다. 사실 동물만큼 건강하게 잊는 존재는 없죠. 뒤끝 없는 무-기억만큼  신의 근처까지 가는 것이 있을까요? 인간은 기억 때문에 초월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중딩 때, 도서관에서 읽었던 제목이 기억 안 나는 세 권짜리 <신화> 시리즈가 기억납니다. 거기 어느 예시에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가족/친구가 그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면, 반나절만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사느라 다 써버리고 다시 빈손이 되죠. 돈 준 이들이 놀라면서 다시 돈을 주지만, 역시 하루만에 동내고 말고요.  그는 그저 의욕없는 타고난 허무주의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어요.

가족과 친구들은 그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를 계속 줬고, 거부를 모르는 그는 그걸 계속 받았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바깥으로 돌며 살았고, 돈의 마력에도 녹아나지 않았고, 쾌락의 극단에도 물러지지 않았으며 자기 닮은 생명의 신비에도 눈감았습니다. 
(바른 기억인지 자신 없는데,) 마침내 어느날 신이 등장하여 그를 심문했죠. 
"너는 왜 마지막 집착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따위로 살고 있느냐?"
"저에게는 본래 집착이 없습니다. 다만 저를 닮은 아이들을  만들고 보니 옛기억이 새 희망이 되어 새록새록 같이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남자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더랍니다. 그래봤자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바로 익명의 삶을 산 것이죠. 그에게는 기억에 사로잡힌 평범한 희망이 옷처럼 덧입혀졌습니다. 아마 그냥 평범한 사람보다 더 평범한 사람으로 죽었을 거에요. 으례 나중 된 사람이 더 되는 것처럼. 
제가 이 얘기에서 얻은 것은 망각의 반대어는 기억이 아니라 익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니체는 동물신의 권능에 조아리며 건강한 망각 쪽에 한 표를 던졌죠. 그의 잔혹 미학은 다른 게 아니라 사자와 같은 삶의 태도로부터 시작하여 아기처럼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자의 무-기억이란 인간으로서 얼마나 부러운 것이냐, 라는 것. 그러나 이 건강한 망각은 단순히 기억 능력이 사라지는 것, 무능력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기억할 수 있음에도 무-기억으로 나아가는 것에 가까운 것이죠. 넘어가는 자의 고차원 정신이랄까요.

저와 친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니체 같은 방식을 답습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같은 범인들에겐 망각해서는 안 될 의무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게 한걸음 내딛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통화를 마치기 전 친구가 키득댔습니다. 
" ㅋㅋ 그 쌀쌀맞은 말투는 세월이 가도 안 변하는구나~" 
-  그래서 다음 생에서 나 같은 친구 안 만나려면 이 생을 현명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 마지막으로 펀치 한방 날려봐."
- 나쁜 기억은 신문기사 읽듯 그날그날 소비한 후 버려. 묵은 기사 파고 있는 한 다양한 뉴스는 너에게 가닿지 못하니까.
"흠..."


덧: 이렇게 낙서질하는 것으로 저도 오전 내내 친구와 나눴던 말들을 망각해버립니다.  - - 
창밖을 보니 날이 맑고 햇살이 화려하네요. 봄이군요. 봄이 오기 전에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를 봐야 했었는데 놓쳤구나... 아직 기회가 있는 걸까? 하는 무의식이 의식 위로 떠오릅니다. 뜬금없이.
 
    • 사랑의 반의어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는 것처럼, 망각의 반의어가 기억이 아니라 익명이라는 말슴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탈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요.

      • 기억이 겪은 것 아는 것을 다시 맛보는 것이라면, 익명은 책임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지속적인 것을 거절하는 것이죠. 세상/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된다는 점에서 망각의 반대어로 당당하게 자리잡을 만합니다. - -

        문득 <무진기행>이 떠오르네요. 모든 기억을 무진이라는 상상적 망각 공간에 묻어 두고 다시 도시의 익명으로 돌아가는 남자. 의식의 조작 과정을 통해서, 상상의 망각 공간을 설정한 후 그에 대한 반대로 익명의 부르주아로 살아간 남자의 이야기.
    • 나쁜 기억만 떠올리다 보면 나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기뻐했고 고마워했던 기억도 분명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살게 되는 것 같아 아깝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적이 있어요. 좋든 나쁘든 과거의 일에서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게 힘든 듯 해요
      • 어떤 기억은 간직할 필요가 있겠죠.  미풍에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를 바라보며 기분 좋은 바람소리를 듣는 것처럼 우릴 행복하게 만들어주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지금 현실과 연대할 수 없는 나쁜 기억, 군대처럼 나를 무너뜨리러 오는 기억은 망각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 이 시 같이 읽어보아요~


          '당신'에다 '기억'을 대입해도 찰떡처럼 어울린답니다. -_-




          -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 양면성을 가진 기억들이 수십개로 불어나 동시다발 머리에 꽂혀 있으면 ... 특히나 아름다운 기억의 공격은 뭐라 설명이 되지만 괜찮아요. 하루에도 수백번 중얼거리는 괜찮아나만 손해’. 잃지 않으려고 씁니다. 디로님이 익명으로의 삶이 가능한 분이라면 혹시 환생 니체?!! 내공만 한 줌 부탁합니다^^


       


      읽었습니다. ‘기억대신찰떡 넣어도

      • 기억은 일견 구글번역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번역기가 그렇잖아요. 대충 문맥을 파악할 수 있다가도 어떤 단어들을 고립시키므로써 맥락 파악을 못하고 헤매게 만들곤 하죠. 이름하여 발.번.역. 
        기억도 정교하지 않은,  내가 지나온 시간의 전체적인 맥락 정도 파악하는 번역기 수준의 한계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문서 전체를 섬세하게 다 번역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요, 그 중에서 어떤 의미를 택할 것인지 현재의 '나'가 고민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백만년 만에 (찰떡 아니고~) 시루떡 먹었어요. 바둑 두면서. -_-
    • 모 철학자는 뇌가 기억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망각을 위한 기관이라고 했었죠. 몸은 모든걸 기억하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 니체식 기억 이야기는 흥미롭네요. 자기동일성과 기억의 관계를 생각할 때 무-기억으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유지할지 궁금하네요. 익명적 존재면 누구도 아닌 존재가 아닐까 하고.
      • 기억에 따른 자기동일성은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연속성'에 자리를 내주기 마련입니다. 극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치매를 앓는 노인 A가 기억을 다 잃었다고 B라는 다른 사람인 게 아니잖아요.
        소작 농부의 삶처럼 온종일 전전긍긍하는 사이클을 되풀이 하느라 현대의 호모사피엔스는 생각하는 능력과 실행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망각 능력이 상실/ 파기되고 있는 시대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
        온갖 자극이 범람하는 시대에 의지적 망각을 결단할 줄 아는 게 능력이라는 생각은 저의 주장이라기 보다 순전한 기대일 수 있습니다. - -;

        조카에게 메일로 알려주고 싶은 여러 이야기들을 보내주는데, 몇 주 전 건넨 얘기를 기억 못하더라고요. '그새 잊어버렸네?' 라고 슬쩍 놀렸더니 이런 답을 보내왔어요. "재미있는 것일수록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 다시 재미있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
        이게 바로 니체가 말한 망각의 긍정적 기능이 발현되는 자세구나 싶었... ㅎ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9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1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8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4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