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죠

오전에 어느 갤러리 전시장에 갔다가 잊고 있던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한참 동안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만큼 다른 관심/공간적 거리가 있었던 거겠죠. 그와 커피 한 잔 나누는 중에도 이 마주침은 착란이 아닐까 싶었으니까요.

그가 물었습니다. "나를 그리워한 적이 있어요?"
제가 답했습니다. - 그런 질문은 어떤 거짓말보다 나쁜 거에요. 
그가 물었습니다. "왜요?"
제가 답했습니다. - 뻐꾸기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는 기적을 인생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착란이라고 해도 혼자서 느끼는 거니까 설명할 수는 없죠. 
그가 한숨쉬었습니다. "넌 하나도 안 변하고 고대로구나."
제가 맞받았습니다. - 그렇게 서로 이해 못한 채 다르게 살다가는 게 인생인 겁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은하철도의 밤>에 나오는 조반니가 연상되는 분위기를 느꼈어요. 우주에서 자청룡빛 별들을 보면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스탠스가 느껴졌달까요. 아니면 지상에 붙은 땅강아지처럼 코를 박고 사는 것에는 영 흥미를 못 느끼는 성향이 느껴졌달까요. 대학 졸업 무렵, 은사님이 저와 잘 맞을 거라며 강력 추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레브로프의 <우주와 지구와 인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주정거장에서 하루이틀은 자신이 속한 고향과 자기 나라만 찾아본다. 사흘나흘이 되면 자신의 나라가 속한 대륙만 보인다. 닷새엿새가 되면 지구가 하나라는 사실에 문득 눈뜨게 된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코스모노트라고 하죠.  그는  그런 사람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제 느낌/판단입니다. 지구가 하나라는 사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본다는 코스모노트의 관점을 존중하지만 그가 술은 예전보다 좀 줄였기를.... 그야말로 우주예술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덧: 보스가 맛있는 밥 사주겠다는데 토기가 일어서 응할 수가 없습니다. 뜻밖의 조우에서 받은 감정적 영향이 제법 큰가봅니다.  - -

    • 너 새끼야 하나도 안변하고 고대로구나 이런 소릴 나한데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코스모노트의 의미가 뭘까 나름 날 생각해보네요
    •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 함 써봅니다. (재미있게 읽힐런지는 모르겠으나... - -)


      은사님이 니들은 찰떡궁합일 거라며 소개해서 첨 만난 날, (이십대 초반이었죠) 청바지에 흰 면셔츠를 입고 나왔더라고요. 그 인상이 참 신선했어요. (나름 어른이 주선한 소개팅이었으니까요.  - -)  첫만남인데 그간의 자기 연애사를 주절주절 떠들어댄 게 특이했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새벽 다섯시쯤 전화가 왔어요. 집앞에 와 있으니 나오라고.


      눈꼽도 안 떼고 문밖으로 나가보니, 십미터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더군요. 우리집이 평창동 산꼭대기라 그 시간에 거기까지 오기 쉽지 않은 행동력이거든요.


      근처에서 같이 아침 먹었는데, 제안하기를 딱 한 달만 만나보자더군요.  그러고도 자기에게 아무 감정 일지 않거든 끝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한 달 동안 새벽에 집 앞에 와서 서울 근교 낚시터로 절 데리고 다녔습니다. 제가 바둑만큼 낚시를 좋아하거든요. 근데 한 달 후에 그와 어떻게 끝났는지가 기억에 전혀 없어요. 그것참.


      어디서 제 전번을 구했는지 좀전에 문자가 왔길래 함 써봅니다. 제가 만나본 중 가장 프레쉬한 느낌의 남자였어요. ㅎㅎ 

      • 프레쉬 하달까 매력이랄까 소설 on the road 느낌의 스무살 무렵의 아는 애가 있었는데 곱상한 안경쓴 얼굴만 기억나고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어디서 만나고 잊어졌는지
    • -저한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아마 전 선생님보다 10만배는 더 동요할테니까요. 




      -코스모노트 좋네요. 우주에는 나가기 싫지만 코스모노트는 간절히 되고 싶어요.

      •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긴 해요. 하지만 그런 소심함은 뚝!
        이런저런 경험들이 우리의 정신을 구축하는 거니까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시간대/별자리를 만들고 망설임 없이 나아가 보는 것. 멋지죠.
    • 감정적 영향이 있었다는 걸 보니 102, 3번 중의 하나는 되는가 보군요. ㅎㅎ
      • 그가 유독 31이라는 숫자를 좋아해서 서른한 번째 애인으로 각인돼 있.... 다는 게 어제 기억났어요. ㅋ


        삼년 전에 결혼했다며 가족사진을 보내줬는데 오호~ 아내가 굉장한 미인이네요. 제가 감독이라면 캐스팅해서 영화 한편 찍어보고 싶을 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요. 아내가 파스타를 잘 만드니 와서 함 먹어보라는데, 이 사람 제가 밀가루 음식 안 먹는 걸 잊었나봐요.



        • 난 이칠 가보 아는 사람 다 합치면 스물일곱 될까
    • 저한테도 그런 마주침이 생긴다면 이 시처럼 될 거 같아요^^




      환상의 _ 강성은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 너무 명백해 그렇네요 초록색 한해 여름이 아닌게 현실이면 어떠랴
        • 하아~ '초록색 한해 여름이 아닌 게 현실이면 어떠랴' 

      • 이 시 감사히 받고 (모든 시집을 다 사는 편이니 책장 어딘가에 있을 거에요.) 연상되는 시가 있어서 한 편 붙여보아요~




        눈 온 아침 / 이영광



        천지가 눈을 쓴 채 가만히 있다
        지붕들도 나무들도
        각(角)이 안으로 무너졌다

        만만하여,
        만만치 않다
        마을 속의 마을
        마음 속의 마을
        겉으로 부풀어 둥글다

        안팎이 있다면 다들
        꼴이 같으리
        당신, 누구와 한편
        되어본 적 있어?
        당신 편 하얗게 지우고
        누구 편에 가 서본 적 있어?
        물어쌓는 눈발

        눈을 쓸면 새 길이 난다
        세상의 모든 딜을 낳는 골목
        후미진 모퉁이에서
        저 미지의 길끝까지 걸어가
        가가호호(家家戶戶)
        따뜻하게 쓸어오고 싶다
        눈 온 아침

        • 아침부터 시 읽어요 꼭두새벽인 사람들 많은데
        • 비 오는 오후에 이런 시를 만나다니.. 다함께 빙판길 조심하기로~

    • 아 저도 '나를 그리워한 적이 있어요?' 이런 소리좀 듣고 싶네요

      • 나를 그리워한 적이 있어요?


        저는 이런 소리좀 해주고 싶네요. 근데 있어야 말이지. 어디로님 부러울따름이죠. 글마다 한두번이어야 말이지.

    • 좀전에 그가 문자로 설명해주기를... 우리가 한달을 다 못채우고 끝났대요.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우리집에 난데없는 방문을 하셨는데 롤스로이스가 떡하니 우리집 문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제가 이꽉물했기 때문이라고. 


      그 럭셔리한 차가 떡하니 우리집 앞에 의기양양 버티고 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가 저와의 첫만남에 가지고 나온 차가 폐차 직전의 작은 용달차였어요, 새벽낚시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 어머니가 며느리감 재목 감수하러 오셨던가 본데, 그것도 어이없었으나, 모자의 자동차가 보여준 불협화음에 제가 엄청 분노했던 걸 거라고.... 


      기억납니다. 근데 이런 사실이  왜 저의 기억 저편으로 까마득히 사라져 있었던 걸까요. (제가 너무 대충 사는 건가요?)



      • 단편 영화에서 케이블드라마로 마무리 된 거 같아요. 제목은 용달차에 태운 롤스로이스^^ 

    • 하하 . 별 얘기 아닌데 히스토리를 읽어내는 그날님만의 감성이 확실하게 있나 봅니다. - -


      그가 22개월 된 아들 사진 보내며 한마디 적었더라고요. "얘가 성질부릴 때마다 니 생각이 났다. 그러니 같이 키워보자~"


      이런 억울한 소리까지 들어야하다니. 그것참. 


      골질하느라 큰대자로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진이던데 뭐 아이의 성향은 짐작이 되더만요.ㅋㅎ

      • 우리 옆 은하 만큼 먼 시공의 연을 만들어놓고 같이 키우자니 염치도 좋은 놈일쎄
    • 에이~ 저와 다시 연결된 게 좋아서, 여전히 저를 신뢰한다는 뜻에서 요래조래 해보는 말이잖아요. 놈놈 그럼 앙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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