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님의 아카데미 수상 소감을 듣고

뒤늦게 오늘 새벽에야 아카데미에서 수상하시는 장면을 봤습니다.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시는 부분에서 마음이 뭉클했어요.

언젠가 로이배티님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리뷰에 몇 줄 댓글로 남긴 바 있는, 십여 년 전의 제 블로그 낙서입니다. 꿈에서 김 감독님과 나눈 대화이고요, 중간의 사적인 대화는 생략했습니다.

김기영 감독은 한국인 중에서 저에게 인간 심연의 바닥, 그 극단과 극한을 보여준 지식인 중 한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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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감독님. 소식 들으셨죠? 최근 충무로에 그로테스크한 시나리오 하나가 다시 출현했다고 해요.

김기영: 어떤 내용인데?

나: 오늘 어느 모임에서 독재자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났던 옛 중정부장 김형욱의 뒷얘기를 들었어요. 여의도와 삼청동을 하염없이 배회하던 유령 같은 존재, 여배우의 호출을 받고 몸이 달아 파리로 날아갔다가 실종당한 분 말이에요.

김기영: 뭣이라? 그 시나리오는 기둥줄거리부터 사실 관계가 분명치 않아서 투자자 구하기 힘들지 않을까?

나: 속닥속닥 전해지는 바로는 결정적 증언을 담은 역사 호러스릴러로 만들 수 있을 거라서 투자는 걱정 없다고 해요.


김기영 : 자네, 나와 기획 일 해볼 생각 없나? 내가 시나리오 도사되는 길을 안내해줄 수 있는데...

나  : 음. 스무살 이후로 영화에 대한 애정이 시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세계에 별 미련이 없어요. 감독님 같은 분이  너무 급히 가신 게 안타까울 뿐이죠.

김기영: 예고 없이 훅 떠난 건 좀 그렇지? 삶이 다 그런 거야. 


김기영 : 김형욱이라... 남자 중에 돈이 아깝거나 체력이 달리면 자기 욕정도 못 챙기는 부류가 있어. 그가 그런 놈이었지.

나 : 감독님, 그거 <하녀>에 나오는 대사 아니어요? <화녀 82>였나?

김기영 : ㅎㅎ 당시에 <하녀>나 <화녀> 같은 영화를 상영할 때 꼭 중정요원들이 시사회에 와서 보고는 사전검열을 하곤 했어.

나:  강압적으로 많이 짤렸나요?

김기영 : 아니, 나를 변태라고 생각했으나 영화는 재미있게 보더라고. 사실 내 영화가 섬뜩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잖아. 그걸 어떻게 무지막지하게 짜르겠어?

나 : 중정요원들도 감독님 팬이었나 보네요. 그런데 저는 감독님이 그 시대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하셨다고는 생각 안 해요.


김기영 : 예술은 직접적으로 하는 게 아냐. 표현주의는 파시즘을 예감한다. 몰라? 

말하고 싶은 게 뭔데? 나 얼른 가서 유작으로 남겨뒀던 <악녀> 찍어야 돼. 자네도 열심히 일해. 젊은이들은 분발해야 돼.

나 : 헛 이 정신머리 좀 봐. 은퇴한 권력의 2인자 김형욱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는데 대화의 초점이 어긋나버렸네요.

김기영 : (엉뚱하게) 명자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한 말 '아유, 오늘은 달걀이 얼마나 크고 실한지 몰라요.'라는 대사의 무게를 알지?

나:  네. <화녀>에서 윤여정이 발랄깜찍한 표정으로 읊은 유명한 엽기 대사잖아요.


김기영 : 윤여정은 지금의 김희선/김민희 처럼 방방거리는 소녀였는데, 실은 난 처음부터 그 아이를 청승맞게 느꼈거든.

나: .......

김기영: 자네만 알고 있게. 여정인 피둥피둥 살찐 닭들의 케이지를 비웃을 수 있는 유일한 그 시대의 일프로 여성의 모습이었다는 것. 쉿,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게. 비밀이니까. 우하하핫


나 :  처음 <하녀> <화녀> <화녀 82> <충녀>로 이어지는 시리즈를 볼 때는 사실 컬트 영화로 킥킥거리면서 봤어요. 근데 다시 보노라니 이건 완전히 우리 불행했던 현대사의 밑바닥을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내면의 기록이더군요.

김기영 : 그렇다고 너무 리얼리즘 쪽으로 기울지 마. 난 스타니슬랍스키 전문가지만 재현 중심으로 가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해. 현실과 허구가 뒤섞여야 오히려 리얼리티가 살아난다고.

나: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김형욱이 야심한 밤, 파리 교외 양계장에서 머리부터 갈려서 죽는 건 매우 결정적인 장면일 거잖아요. 거기에서라도 이 장면을 포함한 정치호러스릴러를 한번 연출해보셨으면...

김기영 : <악녀> 마저 찍어야 돼. 이승에 있을 때, 너무 의욕을 냈더니 아직도 몸에서 불이 확확 나.


나: 사실 그 김형욱의 닭모이를 프랑스의 닭들이 모른 척하고 먹고 달걀을 낳았을 거 아녜요? (딴청 피우며) 얼마나 크고 실했을까요. 

김기영 : (반색 하시며) 아, 그렇군. 내 취향인데 그래.

나 : 일단 제목 정하기가 쉽진 않겠어요.

김기영 : 제목이 난제긴 하지.  김형욱이랑 나뒹구는 여배우로는 누가 좋을까. 자네가 추천해봐.

나 : 공효진이나 배두나 어떠세요?

김기영 : 안돼. 청승맞아야 돼. 누가 좋을까. 그래! 이다해.

나 : (뭐하러 추천해달래신 거야. 쳇)


김기영 : 그리고 커다란 괘종시계가 12시를 치지. 그러면 이층 계단 아래에서 부인과 검은 안경을 쓴 두 남자가 나타나서 소리지르거든. '자정이 넘기 전에는 돌려보내라고 했지? 그걸 어겼으니, 넌 이제 우리 영감 못 볼 줄 알아.'

나: 감독님, 그건 좀...

김기영 : 마음에 안 드나? 남자는 다 비슷해. 여자 생각만 하면서도 잡혀갈까 봐 다들 안 하는 척 하는 거야. 

나 : 아,아니.. 그보다도 이건 용의 발톱이 하늘을 그은 정치호러스릴러물이니까요. 

김기영 : 그렇다고 치정과 남녀의 권력이 빠져서야 되나. 영화는 그게 있어야 돼. 그래야 지방 부자들이 돈보따리 싸들고 찾아와서 영화에 투자하게 되는 거야.

나: (갸우뚱~) 


꿈에서 만난 김기영 감독님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나리오가 엮어지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영화인생을 돌아보시는 듯했다.

사실 김형욱의 닭모이 변신 사건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갭이 얼마나 큰가를 보고하는 뉴스다. 영화 <파고>에서 스티브 부세미가 다리를 덜덜 떨며 분쇄기에 갈릴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수다쟁이의 최후에 파안대소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권력의 하수인이자 권력의 배신자가 그런 식으로 마지막 간 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만감이 교차한다. 

어쨌거나 지상에서 만들지 못한 김기영의 <악녀>를 보고 싶다. 언제. 어떻게?



    • 아, <미나리>는 3주 전쯤에 봤는데 할 말이 아주 많기도, 아주 없기도 한, 묘한 영화였습니다. 한번 더 보면 말문이 트일런지도... - -

    • 여기 나오는 영화 아직 다 안봤어요 표현주의는 파시즘이다 되짚어보면 아닌게 없는 시각의 종점이라니, 실한 달걀이 뭐가 우습지 우리 이모가 옛날에 닭을 키웠는데 남이 오면 쪼고 큰달걀들을 낳어요
      • 김기영의 작품을 봐도 될 정도로는 인생이 긴 거니까요. '화녀' 재개봉 소식이 들리던데 지금이라도 보셔요~ 


        "남이 오면 쪼고 큰달걀들을 낳는" 닭에게 묘한 친밀감이 드네요. ㅎ

        • 닭이 커서 동네사람들이 무서워해서 못들어와요
    • - 혼잣말
      아카데미 레드카펫에서의 한예리 배우의 의상을 두고 난분분하는 글들이 온라인을 달구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게 그렇게 역겨울 정도로 강렬한 중국풍 의상인가? 이해불가한 공격들이어서 놀랍다.
      몇년 전 서너 명의 배우들과 함께 남산에서 그녀와 밥 먹은 적이 있는데, 한국 영화계의 하나의 신호탄이 될 만한 배우구나라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국 여배우에게 흔한 이쁨이라는 표면 너머에 있는 분위기와 표현이 있는 사람이었다. 

    • 댓글 달아주신 거 기억합니다. ㅋㅋ 이렇게 사후에나마 오스카에서 수상자에게 호명되고, 또 이렇게 꿈에서 만나 대화까지 나눠주는 팬이 있으니 김기영 감독은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생전에 더 영화를 누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요.

      • 무의식의 차원에 가까운 자연적인 인물을 잘 그려내셨다고 봐요. 자아 없이 충동을 살아가는 인물 -몰락자- 들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잉마르 베리만을 떠올리게 하더라고요. 양파를 까듯이. 바둑알을 뒤집듯이, 무수한 계란들을 더 깨어보고 떠나셨으면 좋았을 텐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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