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나)를 위한 변명

# 아버지와 종일 바둑을 뒀는데, 제가 바둑에서 가장 재미있게 느끼는 부분은 판을 끝낸 후 복기할 때입니다.  인공지능으로 처리하면 별 것 아니고 현대에서는 영상 녹화만 해 두어도 되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복기 능력은 기억력만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인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 상황에서 가능했을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것은 개인이 성장해가는데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반성 능력은 자기 판단/ 행위를 돌이켜 보면서 그게 달랐을 가능성을 떠올려 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이죠. 현재는 컴퓨터가 실재로 존재하는 자료를 다 옮겨오지만, 그 개별 상황에서 그러한 사실 자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떠올리는 것은 개인의 능력인 것이죠.

#아버지 책상에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이 놓여 있더군요. (아마 재독 삼독 하는 중이실 듯.)
이 책은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라는 아들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중이 역사에서 멀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던진 질문이죠. 요즘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지식인도 많지 않을 뿐더러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각자의 성정을 잠시 누르고 생각에 잠기면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인간에게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거창하고 장황한 질문이어서 던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블로크는 자신의 아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지는 않았으나 문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역사는 시간 속의 인간들에 관한 학문입니다.
역사는 죽은 사람에 관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에 관한 연구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죠. 역사는 왕조나 시대 같은 공식적인 역사 아래 가로놓인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개인의 삶은 너무 짧고 지식은 너무나 광대하여 총체적인 체험을 획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역사는 보편사를 꿈꾸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르크 블로크는 20세기 역사학에 구체성의 힘을 부여한 아날학파의 제1세대 역사학자입니다.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했을 만큼 실천적이었고, 그의 사학 역시 삶의 흐름을 외면하지 않는 실천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게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연결입니다.  "현재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면 필연적으로 과거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이런 언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살아있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자질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쓰면서 현실에 참여하고 있고, 죽은 사람의 연구를 통해 산 사람의 삶을 사유하고 개입합니다. 역사가는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심미적 즐거움까지 줍니다. 역사는 삶의 시간을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독려해줘요. 
<역사를 위한 변명>은 역사가 자신이 얼마나 진실되게 살아왔는가를 고백하는 책입니다.  그의 아들이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 역사에 가까워지는 대중 1인 여기있습니다.


      아버님 존경스럽군요. 그 책은 잘 모르지만 

      •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읽는지를 보여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 주겠다."고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는 말이겠죠. 
    • 게으름으로 순간만으로 사는 난 즉석복권만 사다 로또를 사려고 갔는데 잠깐 어디 갔는지 문이 잠겨 허탕을 치고 곰곰히 생각합니다 왜 운명에 순응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지 못할까 하다 아니다 즉석복권을 사면 될 징조다 아니나다를까 꽝, 어디님 동생의 질문에 아빠가 책을 보시는줄, 암튼 나의 역사를 위한 변명이었습니다
      • 제가 관여할 점은 아니지만, 복권은 안 사시는 게 어떨지요. 만인이 굳이 일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언젠가는 왔으면 하지만 과연..... 

        • 안사게 안되는데요 생애 최대의 목표라서, 그리고 개미만큼 적게 사는데 꼭 사면 200000년 살고 나서 될거라는군요
    • 막스 베버(독일의 정치학자)는 역사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했었죠.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은 언제나 현재의 이익에 따라 새롭게 결정되기 때문에.

      •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법을 알려면 지금도 베버를 읽어야 하죠. 자본주의는 돈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해줬습니다.
        베버는 저에게 노트 쓰는 법을 가르쳐준 지식인이에요. 왼쪽만 쓰고 오른쪽은 비워두기.  그러면 오른쪽에는 인쇄된 내용에 관련되어 있는 내용들이 추가되죠.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주제가 가능한 대로 시각적으로 한 자리에 배치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라는 것.
        이런저런 내용들이 종이의 순서에 따라 배치되지만, 노트에는 시각적으로 한 자리에 병존한다는 걸 가르쳐줬어요. 

        • 생각하니 그렇게 영리하게 쓰는 사람들 있어요 성실의 여행
    • 역사는 사극에 필요.

      • ㅎㅎ 명쾌합니다. 주목할 건 작가와 연출자가 덕지덕지 뭔가를 붙여서 만들어낸다는 거에요. 

    • 역사 한 꼭지를 꼬맹이에게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 항상 머리 쥐어뜯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저 결국은, 이거 왜 배워요 하는 아이들에게 역사(의 의미, 이야기, 현재와의 조우)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이 좀 더 빨리 당겨지기를 바라는 정도가 다 입니다. 아침부터 뭔가 반성이 되네요. 흑.

      • 꼬맹이에게 계몽이라는 건조함과 지루함 없이 역사를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렵겠나요. 저에게 역사를 가르친 가족에게 배운 건  역사를 알면 불의에 저항할 힘이 생긴다는 거였습니다. 어른들이 대도서관 역할을 해야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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