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5 (백두번 째 애인이었던 이와의 재회를 앞두고)

제가 좋아하는 니체의 여러 유명한 생각과 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거리를 두는 열정 Pathos zur Distanz> 라는 표현입니다. 지금이야 이에 관심 두는 사람들 없겠지만 니체가 저 새상으로 갔을 당시에는 유럽 젊은이들이 모두 이 말에 열렬하게 동의했다고 합니다. 토마스 만, 그보다는 나이 많은 슈테판 게오르게 등은 모두 니체의 이 말에 충실하게 살았다죠. 타인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는 니체의 열렬한 의지가 옹호받은 거였죠. 이런 천재들과 이야기하려면 멀찍이 거리를 두고 오래 지켜봐야 하는데 그래봐야 그들은 이미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있으니 저는 이렇게 작은 게시판에다 깨작깨작~
거리를 두는 열정이라는 표현 대신에 <거리를 보장하는 마법>은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이건 동화적인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동화 중에 <거위치기 소녀>가 있는데, 여기에는 어머니가 친히 짜준 손수건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공주가 이웃나라에 시집가야 하는데, 달랑 하녀 한 명과 같이 떠나며  공주가 한 말이 있잖아요. " 하녀는 악독하고 공주를 못살게 군다. 이럴 때마다 마법을 행사하며 공주를 지켜준 건 손수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전에 용기를 얻고 너무 비싸다 싶어 망설이던 타올 열장을 확 질렀습니다. 인터넷에서 얻는 지혜들이 만만치 않아요. 어둔 하늘을 날아가는 포탄을 잡는 기분이 들 때가 적잖이 있습니다. 물론 캄캄한 하늘인 경우가 더 많지만. ㅋ

백두 번째 애인이었던 이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어요.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좀 긴장되네요. 설마 19세기에 유행했던 '결투'로 나아가며 결국 누군가 한 사람이 죽는 결말로 마감되는 일은 없겠죠. 하하. 
죽기 전에 꼭 한번은  봐야할 것 같아서 연락했대요. 마법을 행사하는 묘한 그리움인 거 알아요.


    • 19세기 대결 얘기하시니 조셉 콘라드 원작을 바탕한 리들리 스콧 데뷔작 <결투자들>생각납니다. 하비 카이틀은 평민 출신으로 결투할 수 있는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는 인물인데 자기 파괴적이기도 했죠. 그런데 죽지는 않았어요. 일몰 보면서 본인의 몰락을 실감했을 뿐.


      별 일 없을 거예요.
    • 타인에 기울지 않는 열정 이해가 갑니다 자신들 하나만으로 생의 의미를 만든 사람들이네요, 가격비교로 어김없이꼼꼼히 사면서도 한편으론 장사 힘들겠다는 생각도 함께,이상한 하녀가 있었네요 손수건 아니었으면 시집도 못갔을듯, 좀 대단한 로맨스 같네요 맛있게 먹고 노세요
    • 지금 다른 게 고민이 아니고요. 어젯밤 샤워하고 잤으니 손발만 씻고 세수 안 하고 나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거에요. 어느 순간 몸에 물닿는 게 너무 싫을 때가 있거든요. 오늘이 그래요. 여름이니 냄새가 나려나요. 스킨으로 얼굴과 겨드랑이 정도 쓱쓱  문지르고 나가면 어떨지. 뭐하러 안 봐도 되는 사람들끼리 약속을 해서는 이 고민을 하고 있는지.... ㅋㅎ

    • 백만스물두번째 애인 아닌가요 ㅎㅎㅎ 부럽


      '거리를 두는 냉정'이라고 제맘대로 말을 바꾸고 싶군요.


      비싼 수건을 관리하려면 건조기가 필수일텐데요. 비싼 수건은 대개 두꺼운 수건이라 잘못말리면 고린내(?)가 나더군요.

    • 백두번째 애인...코로나의 위험을 무릅쓰고도 저녁식사를 할 만한 뭔가가 있는거겠죠... 한 몇달 동안은 외부 만남에서 상대방 얼굴을 한번도 못 봐서 그런지 뭔가 낭만적이면서도 스릴넘칩니다

    • 백두번 째 애인을 만났는데... 저를 일초 이초 삼초 가만히 바라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더군요. 제 몰골이 그만큼 한심해서였을 거에요.
      제가 좋아하는 초밥도 먹고 연어회도 먹고 했는데 계산은 제가 했습니다. 거절 못할 만큼 탐나는 엄청난 선물을 들고 나와서요.
      간만에 밥을 좀 묵었는데(먹는 것 아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데없이 기억에도 없던 샹송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이브 몽탕이 부른 <고엽>의 가사. 

      "그러나 삶은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는데,
      아주 부드럽게, 요란법석도 떨지 않은 채 말이다.
      바다는 모래 위에서
      이별한 연인들의 걸음을 지운다."

      모래 위의 걸음이라... 무상한 흔적에 대한 상징이 잘 표현되었죠. 모든 것은 그렇게도 취약해서 잠시 있더라도 곧 사라집니다. 그리고 망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고요. 그러나 가끔 그 사라진 흔적을 찾아보려고 골몰하기도 하죠. 이미 사라졌다는 걸 알아도 그런 것이죠. 
      한국에 있는 동안 한달에 두어 번 만나 밥 먹자, 그래도 앞에 누가 있으니까 좀 먹네라며. 
      그 제의하는 그의 눈을 저도 일초 이초 삼초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걸로 거절했어요. hehe





      • 고엽이 저런말이군요 좋아요 난 모래 발자국이 화석 같은줄 지금도 모르고
      • 백두번째 애인의 다시 만날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끝내 거절하지 못한 선물이 과연 뭐였을까?? 진짜 궁금하네요. 

        • 이 물건입니다. https://www.leak-hifi.co.uk/stereo130


          제가 좋아하는 희귀음반도 어떻게 구했는지 덤으로 가지고 왔더라고요. 옛애인 취향 기억하고 있는 이 사람도 좀 대단하죠?

            • 브랜드가 Leak 인데 소리가 머문다는 옛날 유성기와 어감이 비슷한듯 소리가 머물다 흐르는
    • 헤어진 오래된 연인을 마주하는 위기의 상황!!


      하우에버. 글에서 애수가 느껴짐은 제 기분 탓일까요? 


      온갖 선량함들이 만들어낸 지옥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네.. 맞아요. 거리를 두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 심하게 꽉 차 있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움직인다는 제가 애정하는 철학자의 말처럼요. 

      • 애수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접해서 사전 검색해봤습니다. 마음 동할 때 이 단어로 낙서질 함 해볼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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