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나그네

보스가 계획에 없던 작업 하나를 던져줘서 이 명절 휴일에 집에 못가고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한국의 고유한 축제일을 앞두고 제대로 발목 잡아준 보스에게 감읍하며 사흘 뒤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라 맥주 마시며 작업 중이에요. 칭다오는 제 입맛에 맞아서 오르는 혈압을 내려주는군요. 몇 달째 책상에 세 시간 이상을 앉아 있지 못하는 체력이 된 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침대에 십분쯤 눕는 걸로 버티고 있어요. 숨소리까지 들리는 이명현상 때문에 좀 괴롭기도 하고요. 

추석과 설날은 한국의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축제일이지만, 못 만나던 가족들이 모여 한바탕 놀아보는 축제일이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러운 날이라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죠. 단지 여성들에게 부엌일이 늘어나는 날로 인식되고 있고요. 
서구사회의 축제일은 즐겁게 노는 시간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로/노동이 정지됩니다. 평소 억압되는 상태를 사는 인간들이 일년에 한두 번은 그렇게 해소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명절에도 차례상 차리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 것 같아요.

우리집은 몇년 전부터 아버지가  차례상을 차리지 말고 고궁 탐방이나 하며 명절을 즐기자라는 제의를 하는데,  어머니가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조부모님, 시부모님에게 평소 안해 먹던 상차려서 인사드리고 싶다고요.
좀전에 아직 집에 못가고 있는 이유를 알리느라 어머니께 전화드렸더니 고자질하시네요. 아버지는 마늘 까고 쪽파 다듬느라 입이 일센티미쯤 나와 있고 막내는 다행히 이런저런 전 부치는 일을 재미있게 잘하고 있다고요. 두 남성 분이 제 몫이었을 일을 하면서 여성이 부엌에 갇히는 압박이 어떤 건지 제대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호호

추석은 어떤 의미로든 어떤 감정으로든 어떤 성가심으로든 일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의 시간입니다. 듀게님들, 집에 못 가는 제몫까지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흐르고 변하는 것들에게 치명적으로 상처받은 것들은 잠시 마음에서 내려놓으시고요. 해피 추석~ 

    • 고궁,왕릉 탐방은 제가 명절 때마다 하던 건데 코로나 이후 그만뒀지요. 고궁도 다사전예약제로 바뀌고 그래서 귀찮아서요.  심지어 작년 추석에는 축구 이적시장을 보며 연휴를 보냈죠.

      Btv무료 영화에 짐 자무쉬 영화가 올라 온 걸 대신 봅니다 ㅡ데드맨, 지상의 밤, 다운 바이 로도 있어요. 어떤 이들은 보고 싶어도 물리적,시간적 제약으로 못 봤던 걸 난지금 편하게 집에서 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외국 못 나가는 스트레스가 꽤 쌓여 있어요. <트립 투 스페인>받아놓은 거 보면서 풀어야죠.  이맘때는 주로 외국에 있었죠.

      • 이번 추석 연휴엔 모든 궁궐과 왕릉이 문을 연다던데요.  그동안 명절에는 무료개방해왔으나 올해는 과도하게 많은 관람객이 모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입장료는 그대로 받는다더군요. 
        영화 별로 안 보신다더니 어째 저보다 볼 건 다 보시고 있네요 뭐.

        • 영화를 안 보니까 자무시 영화를 이제서야 안방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지금 보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그 전에 자무시 영화는 서울에서 영화제 형식으로 열릴 떄야 볼 수 있었거든요. 예매하고 아트시네마 찾아가서 그 학구적이고 열띤 분위기에서 보는 건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예요,심지어 5분 거리 안에 있는 영화관  두 군데도 안 가는 저라서요.




          궁궐,왕릉 안 가는 것도 사람들 인파 속에 섞이기 싫어서요. 가 보면 외국인들 많아서 싫어요.

    • 엄마의 정성도 이해하지만 난 하지 말자 편,아버지 일 같이 너 이것 좀 해면 상당히 싫습니다 생각에 정성을 들이는게 좋은거 같기도 하지만 게을러서인지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이명은 체력이 떨어지는 현상인데 그동안 나름 안 관리 노하우를 적극 활용하시길
      • 관습과 의례가 좋은 사람은 없죠. 그래도 그것이 보여주는 민족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돌아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대표적으로 울 어머니가 그래요.

    •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에 도전합니다.

      • 어둡고 비관적인 정조가 들어 있어서 명절 휴일에 읽기에는 적철지 않다 싶지만 사회 비판적이고 인간성의 회복을 강조한 면이 있으니까요 뭐~ 어느 때라도 도전할 가치는 있는 작품이죠.
    • 오늘 시댁 당일치기로 다녀왔어요. 숙제를 한것 같아 홀가분해요. 시댁을 가면 내가 얼마나 찌질한 소인배인지 알게되는것 같아요. 그래서 안가고 싶어요. 


      제 고향은 일주일 후에 가기로 했습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

      • 결혼한 친구들의 공통된 표현이 시가에 가는 건 낯선 섬에 가는 기분이라고. ㅎ 그게 그렇게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방문인 거군요.
    • 추석을 짐 자무쉬와 보내라는 btv의 배려인지 심지어 <영원한 휴가>도 무료 영화 목록에 있습니다.


      <미나리>가 암만 상을 받았다 해도 이민자 이야기에는 하등의 관심없는 저인데다 보고 나서 재미없다는 평이 올라오는 지금 자무시 영화가 좀 더 와 닿네요.

      • 미나리도 보세요. 압박~ 

        • 재미없다고 쓴 사람들에게 니 수준 알겠다,니 식견이 짧다,니가 재미있게 본 영화들 써 봐라,자기객관화가 안 되어 이런 것 봐도 모르니까 한국 드라마나 봐라 이렇게 악담 퍼붓는 거 보고 <승리호>때 나타났던 국뽕 광기가 보이는 듯 해 안 보려고요




          저는 식견이 짧아 못 봐요~  그러니까 자무시 영화나 보려고요

    •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같이 놀면서 며칠 쉬면 안되는 걸까요. ㅜㅜ
    • 일반적으로 한국의 명절이 노동과 휴식이 뒤섞이며 휴식이 독립하지 못한 상태가 대부분이죠. 각자 하고 싶은대로 시간을 즐기는 게 휴식인데 아직 현실이 안 따라주죠. 주어진 환경을 혁명하세요~ ㅎ




    • 일주일에 한번 있는 분리수거일을 놓쳐서 쌓아놓은 플라스틱 제품들이 있는데요. 아랫층 남자분을 엘리베이터에서 딱 마주쳤어요.


      그동안 마주칠 때마다 제가 인사해도 어느 나라에서 온 먼지여~ 라는 자세로 모르쇠하던 분인데요. 


      제 쓰레기 봉투에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는 맥주 캔을 힐끗 바라보더니 "맥주를 많이 드시는군요"라는 멘트를 날리시더만요.


      그것보다 창피한 감정이 드는게 제가 답으로 "한달 간 모은 거에요"라는 변명을 했다는 것. 사실이지만 심장이 빨개졌어요. 흑



      • 사실이면 좀 하지만 아니면 당연히 그렇게 말하게 되죠.

    • 추석 연휴가 끝나가는 지금 이 글을 봅니다. 칭따오와 함께 추석을 마음으로나마 즐기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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