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힌 표현과 겉절이 언어

책을 읽고 영화나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표현되는것은 두 종류로 나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삭힌 표현과 겉절이 표현.
삭힌 표현은 시간 속에서 마음을 쓰고 또 쓴 그 흔적이 작품에다 깊은 주름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표현의 연금술은 대부분 그런 주름 많은 굴곡들을 종횡무진 배치하는 선에서 찾아지기 마련이죠. 
그러나 삭힌 표현 때문에 겉절이 표현이 무시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표현은 발효의 미학이 중요한 만큼 선언의 미학도 중요한 것이니까요. 발효를 지나치게 밀고 나아가서 촛농으로 주루룩 흘러버리는 작품들도 있잖아요. 요즘 노회한 정치적 언어가 국민을 침묵하게 하고 지평을 잃게 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겉절이의 언어는 천진한 고백일 수 있죠. 그것의 본의보다는 반칙으로 비춰지기 십상이겠고요. 복잡성의 현실에서 고백인 동시에 반칙의 언어는 종종 거짓 진정성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능멸하기도 합니다. 눈 감을 수없는 현실을 드러내 보이며 혹세무민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절이의 언어를 무조건 배격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열정에 대한 지나친 불온한 시선이 아닐까요?

작가든 정치가든 나이들수록 새 시대의 구성에 대해 노령의 입장에서 경멸을 짙게 표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조건이 붙어 있지 않다면, 사유를 무늬로 그린 또다른 욕망이구나 긍정하며 접할 수 있을 텐데, 기욕에 불과한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흔합니다. 식지 않은 기욕의 기존 인물들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자신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보여요.

지금은 주름져버린 언어들도 그 주름잡힐 때 접혀들어간 시간에  얼마나 많은 매혹과 동요를 갖고 있었을까요.  그러니 앞으로 주름질 언어가 이미 주름져버린 언어를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주름진 언어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선진국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 앞으로 주름질 언어는 개발도상국 같은 것일까요. 그렇다고 해도 선진화의 이념이 개발도상의 단계가 갖는 역동성을 폄하하는 건 곤란합니다. 오히려 주름진 언어는 다시 주름잡히는 현재에 대한 느낌이 없는 것에 도리어 한탄해야 하는 것 아닐런지.

주름진 표현/언어의 자기반복 중인 맴맴돌이는 얼마나 소모적 소비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또 이미 그것을 다 읽고 모든 것을 다 봐버린 현자들은 어떻게 그들을 견디고 있을까요. 모든 것은 사라지며, 다만 우주적 차원에서 주름의 물결은 다른 것으로 변할 뿐이라고 체념하고 있을까요. 무엇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원으로 순환하며 새주름을 짓고 또 짓고 다시 주름지을 뿐이라고 해탈해버렸을까요?

요즘 노회한 정치인들의 발언들을 접하노라니, 차라리 아직 아무 양념이 배어들지 않은 겉절이가 더 희망 있겠구나 싶어 해보는 낙서입니다. 
이미 오염된 터에 오염됐다는 자각도 없는 어른들의 영혼 안쪽에 어떤 주름들이 촘촘히 물결치고 있는지 궁금하다기 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끈적끈적합니다. 
오만가지를 경험하며 나이들어가노라면 입력보다는 출력의 욕구가 강해지기 마련이겠지만 '어른'에게도 입력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겸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그분들이 모를 리 없겠는데, 그런데......

    • 아, 밝혀두는 게 낫겠군요. 얼마전에 제 프로젝트 물먹인 2급 공무원을 어제야 면담하고 <참 잘 '못'했어요> 손도장 찍어주고 그를 조종한 상관분도 만나고 왔어요. 시원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해서 아침부터 맥주 한 잔 하며 끄적거린 겁니다.

      • 와 다 틀렸다 했는데 완전 쉽게 해결됐군요 축하해요
    • 누군가 비정상이든 정상이든 안떨어지고 올라타 정상으로 가는게 특히 정치판이고 남 위에 서서 부린다는건 나쁜 본성을 다시 찾아야 가능한데 이번 대선은 당당히 자연표출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이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라는 인식의 세기가 되었습니다 정치 이야기 아니어도 좋은 생각입니다 겉절이를 맛있어 할 때가 좋은거죠
      • 반칙한 이에게 옐로카드를 날렸을 뿐이니 축하받을 일은 아니고...  그들을 대하는 순간 은사님이 하셨던 충고가 떠올랐어요. "사회는 이익이나 즐거움을 가져오는 사람보다 충격을 주는 인물에게 반응한다. 범죄자는 용서해도 꿈꾸는 사람은 안 받아들이지."

    • 정치뿐만이 아니죠. 축구에서도 blm때문에  남들 다 하니까 무릎은 굻지만 정작 동양인 차별하는 인간들이 있고 인터넷에서도 소위 대세를 따라 구호를 남발하는 인간들은 있잖아요. 영화평에서도 어디선가 본 듯 한,남의 평을 앵무새처럼 외치기도 하기도 하죠.전에 티모시 샬라메가 우디 앨런 영화  찍고 아카데미 시상식 다가오니까 이미지 좋게 하려고 딜런 패로우에 공감하고 우디 앨런 영화 나온 거 후회한다며 LGBT 단체에 기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라고 봅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Oshima였나요, 그가 싫어했던 hollow man이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싶네요. 


      .

      • 살아갈수록 이런 의문은 들어요. 예술이든 정치든, 세상이 씌워주는 월계관은 그것이 거짓되다는 걸 반증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그들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흠. 사실이 진리처럼 행세하는 세상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뭐랄까, '발전'이라는 이름의 카페에 초대받아 '한국'이라는 이름의 독주를 홀짝대고 있는 느낌입니다.
        • 예술도 변혁을 위한 게 아니라 인정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근 하비 와인스틴 다큐를  보니 아카데미 상 받기 위해 엄청난 캠페인을 벌였고 여자들을 추행하고 다니면서도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부해 자신의 오점을 감췄더군요.

    • 겉절이가 맛있을때가 있고 삭힌게 맛있을때가 있는데 

      • 김장철 전까지는 겉절이가 낫지 않나요.  '취향은 토론이 가능하지 않은 부분이다'는 라틴어 속담이 있으니 뭐 ... -_-

    • [벽과 알]을 읽었을 떄와 비슷한 촉감이네요. 할 말은 많지만 골격만을 간추려 관점만을 공유하는 느낌이요. 다들 알아서 살을 붙이겠지만, 이 상태에서 동의를 이끌어 낸다면 생각도 못 했던 것에 동의하게 되는 마술이 될 수도 있고. 어찌되었든 경청과 정독은 중요한 요건이라고 봅니다.

      • 덕분에 하루키의 예루살렘 상 수상소감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의 소설보다 더 화제를 얻어낸 연설이었죠.  시스템은 벽이고 개인은 그것에 부딪혀 깨지는 알이라고 구분한 이것보다 제가 좋아하는 소감은 따로 있어요.
        독일 <디 벨트 문학상>에서 한 말, " 글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세계'와 둘을 연결시키는'도구'이다. '나'만 있는 글은 답답하다. '세계'만 있는 글은 멀어서 와닿지 않고,  '도구'만 있는 글은 재주가 돋보여서 진실함은 부족해 보인다.. (중략)
        벽의 논리는 '나'를 지키기 위해 '너'를 배제하는 것이고 한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을 구분하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둘을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 폭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벽이어야 한다. "

        <벽과 알>이 화제가 됐을때 친구가 "알이 벽에 머리를 찧어서 얻어내는 건 뭘까?" 라는 질문을 했어요.  '벽을 더럽혀 보는 쾌감 정도 아닐까'라는 답을 했다가 알밤 한대 맞았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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